약속이란 언어를 가진 상대하고만 가능하다. 침팬지가 지능이 뛰어난들 내일 무엇을 하자고 약속할 수는 없다. 약속은 때맞춰 실행하도록 명령하는 예약과도 다르다. 약속은 의미 작용이기 때문이다. 약속은 나와 상대방이 함께 만드는 의미이며, 전해지고 곧 사라지는 메시지가 아닌, 시간을 두고 오래 나누는 의미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릴 상대와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약속을 하는 사이는 각별하다. 결혼 서약이든 정전 협정이든.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 남자는 처음엔 웬 뚱딴지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어간다. 그러나 약속을 나눈 여자와 헤어진 후에 그 약속은 남자의 인생을 지탱하는 끈이 되었다. 너무 약해서 삭아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흐려 보이기도 하지만, 거미줄보다 단단하게 재회의 기대로 이어주는 약속의 끈.
남자는 그 약속이 아니었다면 여자를 한동안 그리워하다가 점점 잊어갔을지 모른다. 다른 여자를 만나서 그녀의 매력을 알아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둘 사이의 관계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가끔씩 추억 속의 여인이 떠오르겠지만, 그 때를 되돌리기에는 용기와 열정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삶을 꾸렸을 것이다.
그 약속은 처음부터 의미의 자리가 비어 있다.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특별해지고, 10년 동안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각자의 삶이 궁금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남긴다.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이 약속은 무한한 해석을 낳게 되고, 여자를 그리워하는 남자는 그 약속에 사로잡히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고 10년 후의 그 날, 남자는 새벽부터 약속 장소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상대방이 나타나도, 나타나지 않아도 가슴 뛰도록 극적인 기다림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약속의 힘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와 약속을 하자, 무엇이 되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