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와 매트릭스의 존재론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들은 고통과 죽음을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여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치가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냉혹한 사회를 배경으로 깔고, 영화는 역설적으로 리플리컨트의 인간성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둔다. 인간적인 가치인 열정, 희망, 사랑을 리플리컨트가 진짜 인간들보다 더 짙게 품고 있음을 보이면서 인간성과 인권이란 개념을 되돌아보는 영화이다.

리플리컨트는 정교한 가짜 인간이다. 진짜와 구별되기 힘든 가짜가 진짜와 만나면서 생기는 긴장감을 그렸다는 면에서 블레이드 러너는 매트릭스와 같은 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 문화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한 1980년에는 아직 디지털 기술이 생활에 깊숙히 들어오지 않은 때이다. 리플리컨트들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보다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더 닮아 있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디지털 사고방식을 전적으로 수용한, 좀 더 현대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은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 소프트웨어 에이전트이다 (단어 agent의 중의법이 절묘하다. 매트릭스에서는 전산용어와 일상어가 중의적으로 많이 쓰인다). 스미스 요원은 소프트웨어적인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나타난다. 길을 가는 행인은 누구든 스미스 요원으로 돌변할 수 있다. 매트릭스 1편에서는 적어도 한 번에 한 명의 스미스 요원만 등장했지만, 2편부터는 아예 동시에 수백 수천 명의 스미스가 등장한다. 같은 프로그램을 여러 번 실행시켜 창을 여러 개 띄우듯, 여러 곳에 여러 명의 스미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스미스 요원은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스미스들은 공유 메모리를 사용하는 프로세스들이다). 반면 리플리컨트는 하드웨어 일체형 인조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리플리컨트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개체이다 (리플리컨트의 AI는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이다).

이런 차이를 생각하게 되면서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에서도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인조인간의 인간미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블레이드 러너의 매트릭스 버전 말이다. 스미스 요원은 설정상 아주 냉혹한 캐릭터이기는 하다. 그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기계들의 대변자이고, 인간의 대변자인 네오가 스미스와 싸우는 구도로 영화가 짜여져 있다. 하지만 스미스는 스미스이고, 매트릭스 공간 안에 리플리컨트와 같은 인간미 넘치는 요원이 있다고 상상하면 어떨까?

물론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레이첼이 데커드와 매트릭스 안에서 사랑인듯 아닌듯 묘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는 장면. 가능한 상상이다.

하지만 레이첼이 순식간에 수천 명이 된다면? 더 나아가서 레이첼 버전 1.0, 1.8, 2.6이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다면? 기억 데이터를 7일전에 백업해둔 것으로 되돌린 레이첼과 15일동안만 레이첼 역할을 할 수 있는 레이첼 데모 버전이 나타난다면? 데커드만을 위한 레이첼 홈에디션이 아닌 모든 이들의 레이첼이 될 수 있는 레이첼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이 나타난다면? 그래도 레이첼로부터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것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레이첼은 이들 중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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