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

2002년 2학기 '한국근대민족운동사'수업 과제로 쓴 토막글.
드물 만큼 알찬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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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멘토에 나오는, 15분 이상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내를 생각해 보자. 그는 아내의 원수를 갚는 데에 삶을 바치지만, 이미 예전에 자신이 범인을 잡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의 자신이 한 일을 내일 기억할 수 없다면, 내일을 준비하고 배려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기억은 주체가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개인이 죽음으로써 타인의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한편으로, 개인의 범위를 넘어 집단이 감정과 의지를 가진 유기체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것의 가장 큰 범위가 민족이다. 민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장하기 위해 기억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민족은 교육기관을 통해 그들의 공식적인 기억을 후대로 이어나간다. 국사교과서를 쓰는 일은 그 전수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민족을 대표하는 역사인식을 민족 구성원에게 유포한다.

제국주의 식민지 시기를 겪은 민족들이 자주적인 역사 교육을 봉쇄당한 것을 큰 수난으로 여긴 것은 타당하다. 민족이 스스로의 역사를 전수할 수 없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와 같은 상징적인 의미의 수난이 아니라, 민족의 존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좌우하는 실질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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