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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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첫 인상을 갖게 된 건 2학년이던 어느 날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동창들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반이 흩어져도 계속 모이게 되는 친구들의 인맥이란 한 반에서도 몇 개의 파로 나뉘게 되는데, 그 날은 박가, 나, 영화, 태성 등을 위주로 모이던 것이 커져서 그럭저럭 많은 친구들이 동석했다. 이 때문에 평소에 잘 안 하던 연락이 닿아 그도 참석하게 된 것이다.

맞다. 그에 대한 첫 인상은 고등학교 1학년 때가 아닌 대학교 2학년 때의 만남이다. 같은 반에 있을 때에는 일 년 동안 나와 그가 나눈 대화의 분량이란 게 십 분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대화도 내게는 없다. 그러고는 그저 수많은 동창들 중 하나로 잊혀져가고 있었다.

부천대 앞에 있는 작은 지하주점에서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특유의 화술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는 삼수를 준비중이라고 했다. 지금 신세는 내세울 것 없지만, 원하던 광고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면 열정을 바쳐 광고에 뛰어들 것이라고, 수능만 잘 보고 나면 그 기념으로 동석한 친구들에게 나이트를 쏘기로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불안정하고 소심해지기 쉬운 상황일 텐데도 그의 겉모습만큼은 당당하고 힘이 넘쳤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온 세상이 그를 위해 응원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와 나는 다시 수많은 동창들 중 하나로 되돌아갔다.

일 년 반이 지났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민섭인데, 잠시 시간 있냐고. 나는 친구들끼리 술자리나 하려나보다 하고는 그러마 하고 나가기로 했다. 뜻밖에도 그는 나와 단둘이 만날 생각이었다. 그것도 전망 좋은 카페에서. 그는 졸업 후에 지내온 이야기며 친구들 이야기며 요즘 자주 듣는 음악 이야기까지 조근조근 풀어나갔다. 내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를 보고는 나를 만나보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반갑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친구 만들기는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혀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녀석이 특이하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카페 초대의 답례로 시집을 사 주고는 함께 고등학교 1학년 반창회의 인파에 묻혔다.

그 때부터는 그는 내 삶의 든든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를 통해서 꽤 많은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중3때 같은 반이었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는데도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던 정수. 그의 남다른 정치성향 때문에 한동안은 민섭이보다 더 자주 만나고 토론하곤 했다. 고2때 같이 동아리를 만들었다가 흐지부지 되면서 흩어진 친구인 봉규. 놀라운 드럼 솜씨를 지닌 대섭. 알고 보니 지척에 살고 있던 영욱. 모두 그 덕분에 재발견하거나 새로 얻은 친구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와 마찬가지로 멋쟁이들이다. 약아빠진 속물들이 세상을 지루한 곳으로 만드는 동안 그와 그의 친구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삶을 멋지게 가꿔가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뛰는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진짜 젊은이들이다. 나는 그가 일하는 직장에 놀러 갔던 밤에, 타는 듯한 그의 속마음을 노래로 들으며 전율했었다. 어떤 가수의 콘서트도 이보다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는 나와 다르다면 참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믿는다는 공통점 앞에서는 그 차이란 대단하지 않다. 오히려 똑같은 것보다는, 그에게서 내가 겪지 못한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그 꿋꿋하고 낙천적인 성격과, 시원시원한 생김과, 여자 앞에서는 특히 더 그럴 것 같은 자상함은 언제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핑계에 불과한 바쁜 일상 때문에 두 달 넘게 만나지 못하거나, 메신저의 대화도 짧게 줄여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마다 들게 되는 '나에게 그는 그렇게 사소한 존재는 아닌데...' 하는 미안함 섞인 아쉬움과,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은 수줍음에 겨워 한 시간 전부터 그의 미니홈피를 열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 Comments

시간은 참 잘도 간다.
함께한지 짧지 않은 시간. 우린 참 많이 변하기도, 그대로이기도 하다.
지금 꿈꾸고 있는 내일, 우린 얼마만큼 변해 있을까?
확실한건, 시간이 흐른 훗날에도 우린 함께할거다 친구.
땡쓰~

소심쟁이에 겁쟁이들은 올려다 보지도 못 할 정도로 멋진 사람이 되어있겠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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