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론

* 우연과 필연

'외계인이 지구를 점령하러 왔는데, 전직 파일럿인 대통령이 손수 외계인과 전투를
벌였다.', '군더더기 인물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고심하던 작가가 작품 속에 전염병을 돌게 해서 인물을 싹 죽였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고 피식 웃음이 새나올 것 같은 구성이다. 이런 식으로 쓴 이야기가 재미가 없는 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우연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이다. 작품 세계의 질서에 개입해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 대리는 아침에 전철로 출근해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오후 근무도 마치고 저녁엔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하고 퇴근하고 집에 가서 잤다.' 이런 식의 서술은 의미가 없다. 그저 끊임없이 반복될 뿐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정체된 상태를 벗어나 순서지어 배열되게 하는 의미망을 건져내기 위해 작가는 작품 속의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조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연적인 요소는 아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약과 같다. 작가가 작품 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는 것에 맛을 들이면, 결국 독자에게 억지 전개라는 인상만 주게 된다.

반대로 세계를 창조한 이후로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대로 이야기를 받아적기만 한다면, 중간쯤 읽고 나서도 결말이 뻔한 삼류 소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황당하지도 않고 뻔하지도 않은,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한 가지 이론으로써 종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들 중 하나로써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독자가 어느 정도 알고 있을만한 인물과 배경을 선택한다. (고등학생, 연예인, 한강다리...) 그러면 언급하지 않아도 인물이나 배경의 수많은 속성들이 암시적으로 가정이 된다. (수험생활의 부담, 바쁜 스케쥴, 상습 정체...)이 속성들을 이용해서 사건을 일으키면 전혀 작위적인 티가 나지 않는다. 어떤 속성을 활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에 맡겨져 있음에도 말이다. 미처 생각지 못할 속성들을 엮어서 사건을 일으켜 내면, 독자는 장기에서 외통수에 당한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 결과가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억지라고 우길 수도 없이, 꼼짝없이 놀라움을 표시하고야 마는 것이다.

2003년 2월 23일

Monthly Archives

Pages

Powered by Movable Type 5.14-en

About this Entry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by pocorall published on February 23, 2003 8:50 PM.

홀로 앉아 was the previous entry in this blog.

一切唯心造 is the next entry in this blog.

Find recent content on the main index or look in the archives to find all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