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인사이드 합성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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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나 중세의 미술작품들은 흔히 당대에서 널리 통용되던 알레고리로 가득차 있어서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그 그림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켰는지 유추해 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미술사학자들의 과제 중의 하나가 이 상징을 밝혀내는 것인데, 당시의 상징 체계들에 대해 익숙한 눈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에 대한 설명을 듣더라도 그림 보는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웃기는 이야기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누군가 설명해줘야 이해하는 경우에는 웃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에 상징을 담아내는 경향은 근대를 거치면서 점점 약화되어 20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비주류적인 흐름1)으로 내려앉은 듯했다. 그려지는 대상보다 색들의 조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미지를 통해 풍부한 신화의 세계를 다시 펼쳐내는 작지만 활기찬 움직임들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디씨인사이드 합성갤러리(디씨합갤)이다.

디씨합갤에 올라오는 각종 엽기적인 합성사진들은 '필수요소'라고 불리는 사물들에 대한 교양이 바탕이 되어야 사진의 진정한 맛을 알 수 있다. 첨부된 사진을 보자. 서정적인 광고물 같아 보이지만 몇 가지 필수요소들이 교묘하게 합성되어 있다.2) 이 요소들은 어떤 계기에 의해 디씨폐인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면서 생겨난다. 그 계기는 개죽이, 개벽이와 같이 동물들의 귀여운 포즈로부터 마련되는 경우, 문희준, 정몽준, 이천수, 이명박과 같이 비꼼의 대상이 되는 경우, 김유식, 박유진, 최민식, 신구와 같이 서글서글한 인상이나 매체에 등장한 '득햏'풍의 이미지에 의한 경우, 소피티아, 광녀와 같이 명예훼손 우려가 있는 경우 등 상당히 다양하다.

20세기까지는 한 시대는 하나의 코드만을 생산했다. 코드의 변화는 한 사람이 일생동안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진행되다가, 대중매체와 자본주의를 만나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시대에 다른 코드가 생성되는 일은 대체로 공간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분절된 경우에만 일어났다. 그러나 디씨합갤이 가진 활발한 기호생산력은 한 시대가 공간과 언어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코드를 생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디씨인사이드는 문화적인 맥락에서 극단적인 직접민주주의, 혹은 노마디즘을 실험하고 있다. 디씨인사이드 사용자들은 아무도 줄기뿌리로 기능하지 않는3) 리좀이다. 그들의 연결접속에서 그들만의 방언이 발현된다. 생산을 맡은 집단이 대중매체를 통해 유포해서 한 시대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지다가 사그라드는 유행과는 모든 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안으로 리좀을 구성하고 있는 디씨문화는 밖으로도 그 자체가 리좀으로서 역할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폐인문화라는 일정한 외연을 가지는 디씨인사이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들의 삶의 양식을 반영한 제2, 제3의 디씨인사이드들이 등장할 것이며, 이들이 제각각 생산해내는 코드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대표할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스타 워즈, 반지의 제왕 등의 영화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서로의 문화를 종합시키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격리되지도 않고 섞여 사는 모습을 즐겨 그린다. 21세기는 이렇게 문화의 다채로움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첫 세기가 될 지도 모른다.


*** 덧말
여기서 한 이야기는 며칠 전에 쓴, 21세기는 한 사람이 여러 세대를 살도록 강요한다는 요지의 글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과연 자율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까?


*** 註

1) 상징은 초현실주의 등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2) 사진에 나타난 상징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겠다. 디씨인사이드 게시판의 "수햏의 길"에 합갤 필수요소와 각종 리플용어들에 대한 친절한 소개가 있다. 그러나 시간을 갖고 디씨게시판을 둘러보면서 폐인들의 활기찬 생산활동을 직접 느껴보는 쪽을 추천한다.

3) 디씨측의 게시물 삭제나 메인페이지 편집방향 등은 디씨문화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도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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