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불릴 만한 상황은 뭐가 있을까? 밤 새워 밀린 숙제하기, 다이어트, 입시공부, 마라톤....... 무슨 경우든 스스로의 신체적/정신적 한계에 다다라서 힘들어하는 것이란 점이 같아. '자신과의 싸움'이란 바꿔 말하면, 어떤 계기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것을 인내하는 것이라고 봐.
마른 하늘에 갑자기 벼락을 맞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고통엔 원인이 있을거야. 힘든 과목을 너무 많이 수강했거나, 체중관리를 안 해서 살을 너무 찌웠거나, 입시경쟁이 과열되어 있거나........ 물론 한 가지 일에도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지. 아무튼, 어떤 상황이 이뤄져 있고 -> 그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 감내해야 하는 세 단계 중에서, '자신과의 싸움'이란 말은 시련을 인내하라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나머지를 숨기는 고약한 기능을 갖고 있어. 나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미심쩍은 표현보다는, 그냥 '견디기 참 힘들다'라는 표현이 솔직해 보인다.
그 상황이란 것에 대한 책임이, 순수하게 타인에게 있는지, 사회에 있는지, 자신의 선택에 있는지는 칼로 무 자르듯이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만, 어떤 것이 주된 역할을 하는지는 대체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이나 사회의 구조가 나를 힘들게 만들 때 '자신과의 싸움'운운하면서 내 책임으로 떠넘기려고 하고 있을 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고등학교 선생들이 저런 수법을 잘 쓰지. 그래서 내가 '아니오'라고 했냐면... 그랬으면 내가 지금 대학교에 없었을테고...긁적.. -.-;;;)
자기가 주된 원인이 되어 힘든 상황을 만드는 경우는,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을것 같다. 주어진 시련에 어떤 건설적인 가능성을 주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을 메우는 것에만 머무른다면, 그 경우는 바보짓 해서 제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일테지. 흡연으로 폐암에 걸린다던지, 소비습관이 헤퍼서 나이들어 생활이 불안정하다던지.......
그나마 가장 나아보이는 것이, 스스로 시련에 빠지는 것을 발전적인 계기로 삼으려는 일인데, 궂이 그런 방법을 써야만 자신을 단련할 수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몸에 좋다고 쓰디쓴 약을 억지로 삼키느라 굳어 있는 얼굴표정은 보기에도 불편해. 책 한 권을 공부하더라도, '克己'라고 책상머리에 써붙이고 꾸역꾸역 집어삼키기 보다는, 그저 지식을 익히는 걸 놀이 내지는 여가생활처럼 여기고 싶어. 그게 꼭 효율적이어서뿐만이 아니라, 더 멋지게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해. 자신을 싸움의 대상으로 여기다니, 이런 비극이 또 없을껄.
2002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