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금학도

아이고...사지야...
진작에 써놓을 것을, 제출일에 부랴부랴 맞추느라고 밤을 새다니...
그것도 시간이 없어서 밤을 샌 것도 아니고, 놈팽놈팽 놀다가 새벽 두 시에 시작해서 지금은 다서 시다.
우우...반성해야지.

여튼 이 글은 '예술의 철학적 이해'과제물입니다.
이외수의 <벽오금학도>에 붙이는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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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선계仙界를 방문하고 온 한 사나이에 관한 판타지이다. 소설이 갖는 일체의 개연성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설정으로 작가의 세계를 펼쳐낸다. 그 세계는 벽오동이라는 선계와 현세라는 속계로 이분되어 있다. 벽오동은 편재가 가능한 관觀의 세계이고 현세는 편재불능의 견見만이 가능한 세계이다. 한 쪽이 아름다움이 완성되고 깨달음이 완성되고 대상과의 합일이 완성되는 곳이라면 다른 한 쪽은 부조리하고 천박하고 혼란에 빠진 곳이다. 실제로 곳곳에서 확인되는 작가의 현실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세상은 변해 가고 있었다. 국적불명의 기형문화들이 도처에 기생해서 전통문화의 순수성 위에 더러운 구정물을 쏟아 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흐려져 있었다. <9쪽>

아직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움질을 계속 하고 있었다. (......) 유사 이래로 인간세상에 그토록 많은 성자 성현들이 다녀갔는데도 인류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151쪽>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권위가 점차로 위축되어지고 있었다. 사랑보다는 조건이 우선하는 시대가 도래해 있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정조관념도 희박해지고 있었다. <262쪽>

총체적으로 가망이 없는 듯한 세기말적인 속계에서 어린 강은백은 우연한 기회에 현세에서 벽오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발견하고 얼마간 거기에 머물다 '벽오금학도'라는 그림을 들고 돌아온다. 당연히 강은백은 그 며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다시 편재가 가능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가 없으면 이야기가 재미 없다. 그래서 은백은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다시 벽오동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라는 계시를 받고 자신을 선계로 인도할 도인을 찾아나선다. 한편으로는, 환상의 임무를 부여받은 주인공에게 이에 걸맞는 기표가 부여되니, 그것이 바로 바로 하얗게 센 머리이다.

선계의 체험이라는 대담한 설정을 하고 있지만, 은백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은 아주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함부로 말해봤자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현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다. 권력지향적인 아버지나 간사한 식모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서술의 긴장감이 한층 더 흥미롭게 펼쳐진다.

강은백은 사실 퍽이나 수동적인 인물이다. 어릴 적 농월당에서의 삶도, 벽오동에서의 환상적인 체험도, 그 이후에 도인을 찾아 헤메게 된 인생도 마련된 각본에 의해 조종되는 인상을 준다. 그 각본을 준비한 인물이란 바로 탑골공원에서 만나 디지털 시계를 건네주었던 노파이다. 시간상으로 중간쯤에 위치한 사건이 당겨져서 이야기의 맨 앞에 위치하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노파는 은백을 비롯해서 고산묵월, 침한, 고 영감, 손 기자 등 등장인물 전반을 훑으며 놀라운 카리스마와 예언력으로 그들을 사로잡는다.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 수도사는 신기에 가까운 예언력을 갖고 있지만, 실은 기호의 치밀한 판단에 따른 예측이고, 종종 어긋나기도 한다는 내막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 노파는 미래가 제 손바닥 안에 보이는지, 신통력을 발휘해 등장 인물 전반을 휘어잡으면서, 깨달음을 찾아 정처없이 헤메이던 그들이 결국 정확한 자리에 모이도록 연출해낸다. 하지만 깨달음은 구차한 언어로 조목조목 표현되지 않는 법. 윌리엄 수도사와는 달리 어떤 판단 하에 그런 예언을 할 수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지붕 위에 올라서 사다리를 치우는 것은 좋다. 하지만 아직 오르지 못한 중생은 무엇에 의지해서 따라 오를 것인가?

작가는 이 질문에 무심無心과 예술藝術에 의지하라고 답한다. 은백은 오학동과 그림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림으로써 선계에 이른 다소 역설적인 성과를 얻었고, 고묵은 붓으로서 깨달음의 체험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다소 선禪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 소설의 형식을 띤 언어로 그가 우회해낸 진리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집념을 버리고 예술에 귀의하기만 하면 깨달음이 올까? 그 기나긴 수련의 과정에서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올라갈 마땅한 사다리는 찾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영안을 얻기 위해서 심안에 의지해야 하고 심안을 위해서 뇌안이 필요하고 뇌안이 무엇인지 알려면 육안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뇌안과 육안은 얼마만큼 날카롭게 세상을 꿰어보고 있을까? 너저분할 정도로 반복되는 세상에 대한 한탄은 그다지 실천적인 전망을 보여줄 것 같지 않다. 부분적으로 편견에 어린 듯한 인상마저 주는 현실인식은 완고하고 보수적이다. 뜻대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 호통을 치는 일 외에는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어보인다. 작가 자신이 깨달음에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이였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타령으로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정념으로부터 벗어났을 터이므로.

강은백은 세상 사람 그 누구든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편재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단한 각질 속에 갇혀 있었다. <211쪽>

줄곧 이런 류의 신학적인 표현이 수놓아져 있다. 여기에 생명의 말씀이 있노라. 믿지 않는 자는 니 탓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은 실패한다. 그러면 이제는 스스로 각질 속에 갇혀서 외로워질 차례다.

강은백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 밖에서만 겉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강은백은 이제 떠나고 싶었다. 저 투쟁과 음모의 칼날이 번뜩거리는 세상으로부터 가급적이면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다. <211쪽>

구원은 간단하게 실패하고, 스스로 환상 속에 텐트를 치고 별을 보며 천하를 소유한 듯한 느낌에 도취되는 수밖에 없다. 타락한 현실의 시선으로서는 그가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지 벽오동에서 편재를 체험하는지의 구분이 심히 의심스럽다. 정신병원에서의 그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이 의심을 좀 해결해 주었으면 싶었으나, 역시 깨달은 자는 말이 없다.

작품에는 선계와 속계의 이분만이 아니라 제 3의 세계가 존재한다. 속세에 사는 개인들의 삶.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애정이 넘치고 매우 희망적이다. 이들이 등장하는 부분은 극적 긴장감이 살아있고, 표현도 아주 뛰어나다. 정신병동의 면면들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와, 득우의 거친 성품에 비치는 애정어린 시선, 손 기자와 고 영감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끈끈한 인생살이 등은 아주 세련된 품으로 그려져 있다. 놀라운 정도의 시적 감수성도 보여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받게도 한다.

바람이 노파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목 놓아 울고 있었다. <258쪽>

속계에 대해 타령을 하거나, 아예 선계를 바라고 속세로부터는 등을 돌리는 수법 보다는, 이들을 좀 더 세밀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어 그 '각질'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도록 인도했더라면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될 뻔 했다.

너무 투덜거렸나? 이제는 나 자신에게 물을 차례이다. 시간과 돈을 들여 글을 읽었으면 최대한 그에 걸맞는 의미를 얻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도 꼬투리 잡아서 불평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겠다. 구도자적인 삶과 속세의 역동적인 삶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나갈 것인가? 이 책에서 내가 얻어낸 화두다.

2002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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