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대가리가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있을까? 중앙일보 11월 5일 오피니언 란에 난 연대 사회학과 송복 교수의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다. 모 아니면 도, 비슷한 것은 같은 것, 내 의견이 아닌 것은 멋대로 희화화해 넘겨짚어 결론을 내려버리는 꼴통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유석춘 교수는 조선일보랑 손이 맞아 신나더니, 이번엔 또 뭔가? 연대 사회학과 학생들이 불쌍할 뿐이다. 자, 얼마나 대가리가 나쁘면 이런 글을 쓰는지 하나씩 뜯어보자.
송 교수는 교사가 노조를 만들면 교육에 '열의도 쏟지 않고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교원노조는 '그저 가르치고 돈만 타먹는', '월급쟁이'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단체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방식은 파업/태업을 통해 수업을 소홀히 하는 형태로만 나타난다고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교사는 특성상 두 가지의 직업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교육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성직자에 가까운 면과,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월급쟁이로서의 면. 노조를 하면 전자를 포기하고 후자를 노리는 것이라는 순진한 사고가 '모 아니면 도'식의 사고다. '성직'을 위해서 월급쟁이로서의 권리는 포기해야 하는가? 노조가 교육 문제에 있어 현쟁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내는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가? 그의 글은 성경을 읽는 듯한 도그마적인 발언들로 가득 차 있다. 독단적 선언의 허구는 화려한 수사로 치장해야만 하는 법. 교사는 '온몸에 땀이 배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언제나 사명감에 불타야', '의무감으로 불꽃이 일어야'한단다. 듣기만 해도 어지러워서 그의 글에 기껏 논리라고 하나 넣어둔 것이 '공장 노동자는 물질를 담보로 파업을 하지만 교사는 학생을 담보로 해서 안 된다'는 정도 뿐이라는 건 살짝 미뤄지기 쉽다. 하지만 이 논리엔 공장 노동자의 노조와 교사의 노조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단정짓는 또 하나의 단순무식함이 보인다. 집단이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누구도 물건과 학생을 같은 수준에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보장된 연가를 내고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하면서 집회에 참여한 것이 학생을 볼모로 잡은 것인가?
교사의 노조활동은 관료질서의 굴레와 과열입시의 폐단에 맞서 교육자로서의 대의와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시민의 본을 교사가 실천으로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전쟁영웅 넬슨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글에서 보이기로 송 교수는 그가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것에 박수를 보내는 모양이다. 그럼 거기서 '넬슨'을 '나찌'로, '일본군 가미가제'로, '월남에 파병된 미군'으로 바꿔어서도 말해 보라. 어서 말해 보라!
그는 귀에 못이 박힌 '세계화'논리로 끝을 맺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라겠고 벌써 책도 많이 나와 있다. 다만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게 노조랑 무슨 상관인데?"
교사가 노조 활동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하는 일이 생긴다는 대목을 보라. 그냥 웃는 수밖에 더이상 할 말이 없다. 이런 유치한 글에 토를 달아 일일이 비웃어 주려니 구차해 지는것도 같다. 하지만 이따위 글도 중앙일간지에 컬럼이랍시고 버젓이 올리는 것이 남한 지식인들의 현주소이고, 이런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이 남한 대중들의 현실이다. 어쩌겠는가? 눈귀를 막고 살던가 참을성있게 가르쳐 주던가.
민주사회라면 누구나 발언할 수 있어야 하고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약자, 소수, 수적으로는 많지만 원자화된 사람들은 항상 '발언'부터가 난관이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막으려 하는가? 현상으로 돌아가라! 교원 노조의 어떤 주장이 당신의 생각과 배치된다면 그 때 칼럼을 쓰라. 이 밥통아!
20001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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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송복/교사가 해서는 안되는 일 (송복의 글)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특히 교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깨뜨려서는 안 되는 윤리며 규범이다.
▼학생 볼모로 파업한다면…▼
선생은 쉼없이 지식을 연마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선생은 한시도 책을 놓을 수 없고, 어느 때고 학생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교실 안에서만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실 밖에서도 학생을 가르친다. 지식만 학생에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덕행도 손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선생은 가르치는 일을 어느 때고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열의를 쏟아야 하고, 온몸에 땀이 배이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열의도 쏟지 않고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가르치는 둥 마는 둥, 대충 시간만 때우는 행위는 교직자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구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선생이 노조를 만든다는 것, 이것은 ‘죽는 일이 있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노조를 꼭 만들고 싶으면 교직을 떠나서 자동차공장으로 가라. 방직공장으로 가라. 자동차 노조, 방직 노조는 물질을 담보로 파업을 한다. 혹은 태업을 한다. 그건 얼마든지 가당한 일이고, 경우에 따라선 얼마든지 도덕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하면 그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을 볼모로 하는 일이다. 학생을 볼모로 파업을 한다는 것, 혹은 태업을 한다는 것.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런 발상을 하고도 학생 앞에 설 수 있는가. 얼굴이 뜨거워 어떻게 학생을 마주칠 수 있는가. 심장이 돌이라도 그렇게 될 수는 없고, 가슴에 철판을 깔아도 그렇게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생은 그저 가르치고 돈만 타먹는, 그러기 위해서 교단에 서는 그런 월급쟁이가 아니다. 선생은 언제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언제나 사명감에 불타야 한다. 선생의 눈은 그 의무감으로 불꽃이 일어야 하고, 선생의 피는 그 사명감으로 끓어올라야 한다. 불꽃이 일지 않는 눈, 끓어오르지 않는 피, 그것은 선생의 눈이 아니며 선생의 피가 아니다. 그런 선생이 노조를 생각하고 파업을 기도한다. 왜 학부모가 선생을 폭행하는가. 선생이 그런 가당치도 않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Horatio Nelson) 동상의 비명은 바로 우리 교직자의 비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넬슨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그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길 데없는 생의 광영을 현양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의무가 요구할 때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 그 교훈과 모범을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보이기 위해 우리는 여기 이 동상을 세운다.’
이 뿐만 아니다. 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적나라한 국제경쟁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교육밖에 없다. 그것도 ‘최고’ 의 교육밖에 없다.
▼시대의 변화에 무지▼
오로지 ‘교육’ 으로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교육발전을 다른 사람들이 아닌 교직자들이 망치고 있다면 이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 교직자들의 일부가 하고 있는 행위는 시대의 변화에 너무 무지하고 시대의 변화를 너무 거스르고 있는 행위다. 지금 그 일부의 우리 교직자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명백히 교육붕괴를 자초하는 행위이며 그리고 더 명백히는 이 세계화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를 기르지 못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 교육은 평균인 지향의 교육이 아니라 수월성(excellency) 지향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 또한 교직자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교직자들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행동하고 있는가.
송복(연세대 사회학 교수)
누구나 알겠지만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끈임없이 반복적으로 서로에게 주지시키고 있죠. 즉 존중받기 위해 존중을 해주며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공동체 의식일지언데 모두가 존중 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짓 밟았다고 생각한다면, 혹시라도 그 권리를 상실한 대상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걸 깨닳게 해주고 독려하여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우리들이 항상 부르짓는 '안정된사회'인데 중요한 것은 항상 당하는 쪽이 있고, 그 들은 매를 맞는 줄 모르며, 오히려 그게 당연시 되어 그가 곧 자신에게도 제안하려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아무리 설명해도 모자른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