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기둥 뒤의 공간은 있는가?
음악은 함께 모인 자리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을 한다. 즐거운 자리에 음악이 빠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런 때에 음악은 모짜르트의 디베르티멘토처럼 모임의 배경이 되거나, 락 콘서트같은 집단 여흥이 된다. 한편으로 음악은 감상의 형태로 즐기기도 한다. 차이코프스키 심포니나 김광석의 노래는 온화함이나 흥겨움을 찾는 자리에서 즐기기에는 좀 무겁다. 그러나 이런 음악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쪽까지 다가오는 깊은 호소력을 가졌다. 어떤 음악을 이 두 가지 중 꼭 한 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흥과 감상이라는 두 축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가수다의 초창기에 가수들은 양쪽의 균형을 고루 가진 무대를 선보였다. 현장의 신나는 분위기를 돋구는 여흥이면서 한편으로 감상용으로 손색없을 만한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노래가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에 소홀하면 청중의 평가는 쌀쌀했고, 가수들은 마음 깊은 곳에 호소하거나 음악의 새로운 면모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신나는 쇼로서의 음악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그 날 하루 음악을 들으러 온 청중이 투표를 하는 형식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다. 청중으로 초대받는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여러 번 연속으로 초대받기보다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이 초대되는 형태일 것이라 생각된다. 모처럼 방송 녹화에 초대받아 가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들어도 마음에 남을 무대보다는 뭔가 신나는 쇼를 원하기 마련이다.
음악의 기본은 흥겨운 여흥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시간을 돋구는 도구로서 음악이 발전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그렇게 즐기는 것이 뻔해질 때쯤 사색의 순간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제서야 그에 짝을 이루는, 감상에 적합한 음악이 귀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나가수의 청중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에게 그 하루는 흥분되고 신나는 체험이지 곁에 두고 들을 음악을 감상하러 가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는 놀란 표정과 눈물을 흘리는 청중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도 그런 자극적인 분위기를 돋구는 데에 한 몫을 거든다.
유행은 흐르고 흐른다. 진지한 분위기가 지루해지면 '가벼우면 좀 어때' 라는 분위기로 전환이 되고, 속물적이었던 것들이 솔직한 것으로 통한다. 이렇게 주도권이 바뀐 가벼운 문화도 어느덧 사람들이 그 얄팍한 두께에 피로를 느끼고, 무언가 진실된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타고난 외모 말고는 그렇고 그런 아이돌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가능한 가수들을 다시 찾게 된 것인데,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가수는 다른 측면에서 현재 문화의 피로를 오히려 더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체제는 낙오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키고, 탈권위와 민주주의의 극단인 인터넷 문화는 "기둥 뒤에 공간 있다"식의 소통 불능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음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