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기천
이렇게 우울한 사진이 다시 있을까? 별 생각 없이 찍은 사진들을 뒤적이다가 이 사진을 보고 그만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전체 화면으로 보면서 사진이 뿜어내는 안타까움이나 서글픔 비슷한 감정에 압도당했다.
늘 그렇듯이 색감을 조정하려고 포토샵을 만지작거렸는데, 어떤 조작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상태였다. 해질녘의 옅은 푸른 하늘, 이 하늘을 끈적하게 반사하는 냇물, 이끼 색깔의 잡초밭. 이것들이 옅은 대비 속에서만 가능한 하나의 힘을 이끌어낸다. 하나이되 그 안에서 각자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가운데, 초점을 약간 잃은듯한 렌즈는 이들을 더욱 다독거린다. 오염된 냇물의 비린내를 맡으며, 시들어버린 잡초들을 헤치고 보이지 않는 저 먼 곳, 그러나 이곳과 마찬가지로 잿빛인 그 곳으로 가야만 하는 잔혹한 운명을 이 사진은 암시한다. 한 점으로 강하게 집중되는 전선과 냇물. 그것이 그 운명이고, 한 쪽으로 치우친 구도가 그 운명의 음울함을 고조시킨다. 모든 사물들의 배치가 조화롭다. 그러나 여전히 어느 구석인가 불안하다.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색을 갖고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침울하다. 강렬한 아폴론의 빛이 다 하고 곧 어두운 시절이 올 것이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운명은 나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 더 혹독한 자연 속에서도 나는 가야만 하는 곳으로 가야 할 뿐.
2003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