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아하는 화가나 화풍을 한두 가지씩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흐의 고독해 보이면서도 정열적인 작품들이 좋아.", "나는 꽃이 핀 산과 들을 시원하게 펼쳐놓은 풍경화가 좋아."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작품이 특히 나의 마음에 들며, 왜 그런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미적 감수성을 기르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작품에서 이전보다 더 다양한 특징들을 읽어내고, 그 질적 다양성 속에서 작품의 매력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면, 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적인 성취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고흐의 시대 이전에도 고독한 천재 예술가가 있었는가? 풍경화는 고금의 보편적인 회화 양식인가?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있었던 여러 사조들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시대별로 유행한 사조들이 다른 사조와 구별되는 특징이 어떤 것이며, 공통되는 부분을 가진 다른 사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분석하고 종합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손에 잡아볼 만한 가장 적절한 책은 미술사 서적이다.

역사란 것이 대체로 그렇듯이, 미술사라는 분야도 엄청나게 방대한 사료史料들로 입문자들을 막막하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다. 분량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넓은 시각에서 통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내기 위해서는 친절한 입문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다. 서양 미술사를 소개한 많은 책 가운데에 세계적으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고 있는 스테디 셀러가 있으니, 그것이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The Story of Art>이다. 이 책은 1950년에 처음 출판되어 1993년에 16판이 나올 만큼 오랫동안 다듬어지고, 사랑받아온 책이다. 만만치 않은 두께와 값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이 책의 명성은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서론은 미술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명료하게 소개하는 것이면서 앞으로 서술할 많은 내용들에 대한 방향제시의 역할을 한다. 그에 의하면, '미술(작품)'이라는 산물은 '미술가들의 활동의 결과'라는 것 외의 다른 규정을 할 수가 없다. 미술에는 언제나 발견해야 할 새로운 것들이 있고, 누구도 미술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미술작품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규범은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데 걸림돌로 작용되기 일쑤이다. 중요한 것은 조화로움을 실험하고 발견하려는 성실한 노력과 대상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이다. 이 노력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한 다발의 꽃을 가지고 색깔을 뒤섞거나 이리저리 맞춰보며 꽃꽂이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성취하려는 조화로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형태화 색채를 조화시켜서 생기는 이 이상한 감흥을 경험하게 된다. ... 초록색 잎들이 달린 가지 하나가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제대로'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 이상 손대지 말자. 이제 완성되었다'라고 우리는 외친다." (32~33페이지)

그래서 미술작품은 꼭 귀엽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대상만 표현할 필요는 없고, 그 표현방법이 꼭 사실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늙은 어머니나 동네 부랑자의 모습도 훌륭한 작품의 소재로 손색이 없는 것이고, 충실한 재현을 일부러 포기하는 피카소의 작품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대상 너머의 진실을 회화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된다.

저자는 미술이 호사가들의 지적 허영으로 소비되는 것을 경계한다. 명화가 갖는 권위에 그저 따르거나, 기법이나 인물을 외우면서 미술을 알았다고 착각하기 보다는, 그림에 마음을 열고 참신한 눈으로 그것의 매력을 직접 느끼기를 원한다. 이 노력은 정보를 나열하기 보다는 그림을 직접 읽어서 제시하고, 세심하게 선택한 도판을 곁들인 서론 이후의 장들에서 계속해서 관찰된다.

이후에 시작되는 서양 미술사의 긴 여정을 요약해서 여기에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책에서 다루는 분량조차 이미 요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천 년간의 무수한 두께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안한 마음을 갖고 직접 책을 읽으면서, 평생을 바쳐 한 분야를 연구한 노老학자가 철이 들기 시작한 손자들을 앉혀놓고 차근차근 자신의 전공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다정함과, 예술에 대한 애착심을 몸소 느껴보기를 바란다.


이성호
http://pocorall.net/

pocorall 님이 July 12, 2003 7:30 PM 에 작성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