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오후
시계에 적힌 것은 숫자일 뿐, 12까지 차면 다시 1로 돌아오듯이 나의 생활도 얼마쯤 지난듯 하면 무심하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아가지 않는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엉뚱하게도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한 자잘한 걱정들이다. 저녁 메뉴, 숙제, 아르바이트, 군대, 졸업.......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움을 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가 하는 자각에 그저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미래'라는 허구를 잊어버린다면 사람들이 좀 더 웃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배부른 사자는 유희로 사냥을 하지 않듯, 착취를 위한 폭력과 그를 피하려는 발버둥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이틀 전에 본 핑크 플로이드 영화의 강렬함은 미래로만 흐르는 시간의 위력 앞에 희미해지고, 나는 다시 구차한 걱정거리가 널부러진 일상을 반복한다.
2002년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