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어째서 유럽 국가들은 19세기에 들어서 식민지 확장에 성공했을까? 왜 아시아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니고 하필 유럽일까?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했는데, 왜 아시아 대륙에는 대규모 정착촌을 만들지 못했을까? 그곳엔 문명이 발달해서? 그럼 상대적으로 낙후된 폴리네시아나 아프리카 중부엔 왜 정착하지 못했을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왜 유라시아 대륙 말고는 발달된 문명을 자생적으로 키워낸 대륙이 없을까?
이런 질문에는 아주 쉽게 답하는 방법이 있다. 유럽인이 선천적으로 뛰어나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라고 말하는 것. 아시아인은 그보다 하등한 종족어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아메리카인은 더 하등해서 자신의 땅에서 몰려났다고 설명하면 된다.
아쉽지만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2등인류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럼 유럽을 위해 존재한 듯한 근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역사책으로부터 얻는 지식도 시원치 않다. 역사책의 서술은 문명 발생 이후의 기록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왜 아프리카나 오스트일리아에는 오리엔트 문명과 같은 초기 문명이 일찌기 발달하지 못했을까?
<총, 균, 쇠>는 인종주의적 시각의 완전한 반대 지점에서 치밀한 답변을 내놓는다.저자는 초기 인류의 이동, 작물, 가축, 기후, 지형, 세균, 문자, 권력구조 등의 상세한 분야의 자료를 토대로 유사 이전에 예고된 문명의 불균형을 설명해낸다. 그에 따르면 인종간의 선천적인 능력차는 무시할 만한 것이며, 놀라운 문명의 격차는 지리적 환경에 의한다는 것이다.
얼른 눈에 보이는 차이에서부터 근본적 원인으로 소급해 들어가 보자. 16세기에 백수십 명의 스페인 군대가 수백만의 잉카제국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일이 있다. 1:10000. 이런 마법같은 일은 스페인 인의 능력이 만 배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그래서 스페인군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렸다.) 그들은 총과, 잉카인이 면역성을 갖지 못한 세균과, 문자를 가진 문명으로부터 배운 전략을 갖고 있었다. 반면 잉카인들은 가죽 방패와 석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스페인군은 쉽게 잉카의 황제를 생포할 수 있었다. 순진한 잉카인들은 금덩이를 바치면 황제를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배반의 역사에 닳고 닳은 스페인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잉카문명은 왜 그때까지 석기시대였을까? 잉카인은 왜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에 목숨을 잃고, 그 반대는 되지 않았을까? 잉카인은 왜 문자를 갖지 못했을까?
문명은 정착생활로부터 시작한다. 수렵민의 이삿짐은 필연적으로 단촐해야 했으므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발명품을 만들 수가 없다. 그리고 광장이나 성역, 관청과 같은 공공장소도 발달시킬 수 없으므로 문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착을 해야 한다. 북아메리카 서안과 같은 먹을 것이 아주 풍부한 곳에 정착한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정착민이 수렵생활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정착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경작을 겸해야만 하고, 인구밀도가 늘어날수록 경작비율과 생산성을 늘려야 한다. 농업 생산성 향상이 인구밀도를 높이고, 높은 인구밀도가 생산성 향상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순환고리 속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한다.
농작물이 어느정도의 지식만으로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농사를 일찍 시작하지 못해서 문명이 낙후된 민족은 지능이 모자란 탓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렵민들은 그들 주변의 동식물의 특성과 용도에 대해 어느 식물학자보다도 상세히 알고 있으며 최대한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안다. 문제는 작물화에 용이한 식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 안 되는 작물화에 용이한 야생식물들마저 지중해 연안에 편중돼 있었다. 농작물 분포의 확산 지도를 그려보면 지중해 연안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업화는 자생 식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작물에 적합한 외래종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문명의 차이는 다른 요인에 의해 더 벌어진다. 동서 방향으로 뻗은 유라시아 대륙에 비해 남북 방향으로 뻗은 아메리카 대륙은 어렵게 얻은 작물과 정착문명이 전파되는데 더 여려운 환경에 있었다. 농작물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데, 남북 방향보다는 동서 방향의 기후가 대체로 유사하므로 동서 방향의 전파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잉카 문명의 경우에는 고산지대에 있었으므로 기후학적인 섬에 해당되어 작물이 외부로 빠져나갈 경로가 없었다.
세균도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유럽에서 건너간 페스트나 결핵 등에 전혀 면역을 갖지 않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몰살에 가까운 사망률을 보인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할 세균을 갖지 못했을까? 보통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은 가축으로부터 옮아온다. 인간에게 발병하는 세균이 가축에 있던 세균과 동일한 것은 아니고, 가축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인간에게도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가축과의 오랜 생활 속에서 가축이 보유한 세균이 변이를 일으켜서 인간에게 위험한 형태로 전염된다고 한다. 유라시아인들은 오래전부터 가축을 길들여왔지만 아메리카인들에게는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 그들이 세균전에 밀린 요인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문자의 발생원인, 사회 구조와 발명의 필요성, 필요없어진 기술의 도태 등 여러 가지 문명 불균형 요인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이어진다. 지리적으로도 유럽과 잉카 문명의 비교 뿐만 아니라, 폴리네시아에서의 문화적 다양성, 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포 변화, 테즈메이니아인이 낙후된 문명을 가진 이유, 마다가스카르 섬의 인류학적 특이성 등, 다양한 영역에 시선을 던진다. 구미를 당기는 저자의 서술방식도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준다. "...은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을 던져두고 차분하게 근본 원인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서술방식은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xxx일 수도 있는데 왜 ooo일까?" 라는 질문도 수시로 던지는데, 논리적 비약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아주 성실한 학자적 태도도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모든 논의에서 결론은 한결같다. 문명의 격차는 구성원들의 능력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 이것으로 근대화에서 홍역을 앓은 우리의 역사가 변호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민족의 삶에 눈을 돌릴 차례이다. 공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 우리가 백안시해야 할 것은 이민족을 근거없이 백안시하는 우리 자신의 야만이다.
두께도 만만치 않은 이 책을 완독하고 난다면 가족이나 민족과 같은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서 인류 전체를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02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