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 2001/02/17 02:51:40 유니텔 kuorch

비루한 일상, 자의인듯 시작했지만 타의가 돼버린 계획들. 이들에 이끌려 다니면서 신문의 날짜 넘어가는 것만 힘없이 바라본다. 사실 하루하루 하는 일들을 따지고 보면 별로 바쁜 생활도 아닌듯 싶다. 일주일에 세 번씩 있는 과외와 연주회 연습... 이것 외에 별로 얽매어 다니는 것도 없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자꾸만 벗어버리고 싶어할까?

'김 샜다'는 말이 요즘의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절절할 것 같다. 바람 빠진 공처럼 어디엘 갖다 놔도 모양이 안 나고 별 일도 아닌 걸 갖고 흐물거리기나 하니...원인이야 어찌됐든 지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저 견뎌내기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주변의 혼란스러움을 걷어내는 일이고, 허영을 채우며, 안정을 되찾는 일이다.

워낙 늦게 일어난 탓에 잠도 안 오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남해바다가 떠올랐다.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의 남해바다.

하필 전라도인 이유는 단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성이 게으른데다 여행을 즐기는 집안 분위기도 아니라 친척집 갈 때를 빼면 수도권을 벗어난 일이 별로 없다. 아무런 연고없는 곳에서 한 일주일쯤, 바다 구경을 하다 보면 일상의 자잘하고 구차한 일들에 너그럽게 웃어줄 아량이 생기지 않을까?

물론 하루종일 넋놓고 바다만 보고싶다는 구상은 아니다. 날 자유롭게 해줄 도구들이 필요하다. 여유가 되면 꼭 사읽으마 하고 침발라놨던 책들, 무슨 일이 있어도 싸짊어지고 가야 한다. 편하게 책을 읽어본 때가 너무 오래되어 그런 적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씨디와 테입은 열 개 정도 갖고가는 게 적당할 것 같다. 분위기에 맞춰서 듣도록 장르 배분을 잘 해야겠지? 이미 갖고 있는 음반 중에 엄선해서 네 개를 가져가고 나머지는 새로 사갈 생각이다. 쇼팽은 한 때 열렬하게 사모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곡들 중 내가 들어본 곡이 못 들어본 곡보다 많아졌다는 것을 안 얼마후부터 새 곡을 듣지 않았다. 쇼팽이 내게 들려줄 곡이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을 줄이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이런 여행이라면 그의 새로운 곡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놓고 거의 듣지 않은(절대 안 들으려고 했는데 실수했었다. --;;)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야겠다. 피아노는 가져갈 수가 없고, 바이올린은, 글쎄...가져가고 싶지만 짐이 많아질 것 같고 연습할 여건도 안 될 것 같다. 물론 전화기는 두고 간다. 컴퓨터는 편리하긴 하지만 자유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피씨방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다.

해수욕장 주변의 민박촌은 아직 꽃도 피지 않는 3월에는 한산할 것 같다. 혼자 있을만한 작은 방이 흔할지는 모르겠지만, 큰 방이라도 흥정을 잘 하면 돈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것 같다. 미리 좀 더 알아보면 편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 여건이 안 되면 도중에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무작정 가고 싶다.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푼다. 그냥 스치듯이 떠오른 생각이 눈덩이처럼 굴러서 불과 몇 시간만에 여행은 마치 오래 전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기정사실화 돼버렸다. 연주회를 하지 않았다면 당장 내일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일생에 처음 있을 혼자 떠나는 여행을 두고 오늘 밤엔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다.

pocorall 님이 June 10, 2001 4:09 AM 에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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