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자유 2000/12/17 03:23:49 유니텔 kuorch
철든다는게 뭘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그게 아직 뭔진 모르지만 내가 아직 철이 없다는 것만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나는 부끄럼도 많이 타고 뭘 해도 어리숙하다고 생각하는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유능하면서 감정을 남에게 쉽게 들키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한 것을 철든 것으로 생각했었다. 난 철없는 자신이 싫어서 쓸데없이 감정을 위장하기도 하고(지금도 자주 그러는데, 이거 안 좋다.) 혹시 먼저 철든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될까 싶어 이책 저책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철들어 간다는 건 여전히 혼란스럽고, 잘 하고 있는건지 확신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흐릿하나마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함을 알았다. 이건 앞으로 내가 따라야만 하는 어떤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라기 보다는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오던 것에 대한 발견이었다. 우습게도, 철들고자 노력해왔던 의지나 지식 같은것들이 내 바탕에 깔린 그림을 가리고 있어서 그동안 그렇게 혼란스러워 했었다.
삶과 삶에 근본적으로 관련된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흔한 예로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이런 식이다. 삶을 위한 '조건'과 삶의 '목적'을 분리해서 물어본다면 다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질 것이다. 굳이 사는 목적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런 건 없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대신 나는 삶 그 자체와 함께 하는 가치를 발견했다.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은 '자유'이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고, 구속받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일도 자유로이 할 수 없는 사람은 시체와 뭐가 다른가? 역으로, 죽은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곧 삶이다.
돌이켜보면 주변은 나를 구속하는 것들 천지다. 등교, 점심시간, 보충수업, 자율학습, 수능성적, 대학, 리포트, 시험, 학점, 연주회, 인간관계, 군대, 영어, 취업, 월급, 타인의 시선, 자본, 신자유주의...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다 벗어버리려면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피적인 결론이 난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내게 자유는 법칙이 아니라 생활양식이다. '나는 자유로와야만 한다'는 명제에 구속당하는 것은 또 어색한 자기모순이 돼버리는 것이다. 자유로움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이리저리 따져서 한꺼번에 부정하고 산으로 가든지 무덤으로 가는게 아니라, 내가 뭔가에 구속당함을 느끼고 절실한 요구를 느낄 때, 그걸 과감히 벗어버리고 그만큼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한계로부터의 자유, 사회적인 관계에서의 자유, 나의 무지로부터의 자유는 나를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새장의 문이 열리면 날아올라야 한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보다 더 적극적인 형태는 표현하는 자유이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이런 잡문이든, 컴퓨터 프로그램이든, 기말고사용 리포트이든 간에 내 모든 창작물에 나를 실어 날려보낸다. 유치하거나 서툰 결과물에 대해서도 예전만큼 크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신나게 한바탕 날려보내고 나면 집착이란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우기를, 자유는 평등과 더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둘은 모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내게는 평등보다 자유가 더 근본적이다. 불평등에서 오는 소외나 패배감, 분노 등은 낮은 위치의 사람들이 가진 자들에 비해 더 적은 것밖에 누리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남들이 누리는 뭔가를 누릴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부자유가 아니면 무엇인가? 평등/불평등은 자유의 상대적인 분배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평등과 자유는 반비례 곡선을 그리는 관계가 아니라 얼마든지 동반해서 상승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생각만 바꾸면 더불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니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다 알았다는 듯이 주절대냐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20년하고 6개월밖에 안 산 얼뜨기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을 살면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삶을 보는 방식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이전까지의 가치관이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때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건 당시의 환경과 내 사고의 지평에서 나름대로의 최선이었고, 그 나름의 신념에 진실되게 살려고 적어도 마음은 먹어왔기 때문이다. 설사 나중에 살아보니 이게 아니었더라고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 내가' 지금 나의 생각을 뛰어 넘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