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없는 것

어릴 때 보았던 XT컴퓨터의 녹색 화면은 신비로 가득 찬 세계의 입구였다. 컴퓨터로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멜로디를 만들 수 있고, 표 계산도 할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조악했지만, 조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낭만적인 느낌을 품고 있었다. 마치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면서 저 넓은 우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컴퓨터는 희미한 별빛 같은 것이었다.

그 후로 20년 넘는 세월을 지내오면서 오늘 문득 깨달은 것은, 컴퓨터가 신비롭다는 생각을 요즘은 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이다. 오늘의 컴퓨터는 깜빡 방심하면 애드웨어가 깔리고, 어떻게든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결국... 알고보면 헉하고 숨막히는 곳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소통은 찾기 힘들고, 결국 우리는 광고매체의 방문자 중 숫자 1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천박한 곳이다.

생각해 보면 컴퓨터의 신비가 모두 밝혀졌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전락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릴 때와 달리 우리가 매일 구체적인 일과 목표 속에서 지내기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컴퓨터가 전과 같은 신비로움을 잃어버린 것은, 그 앞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난장판을 벌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서로가 관심을 끌기 위해 네온사인을 쏘아대서 하늘의 별빛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컴퓨터의 르네상스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고,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얼마든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컴퓨터가 가진 신비를 좆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낭만적인 상상력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을 마우스가 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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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호 3차 발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발사를 직접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켓이 우주로 날아가는 장관을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여러가지 생각과 사정이 겹쳐서 결국 직접 가서 보지는 않았는데, 발사 중계 화면을 보면서, 가지 않기를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갔더라면 우주로켓이 아닌 애국심을 보러 나온 인파들 사이에서 동떨어진 느낌으로 있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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