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의 근작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었다. 그의 글은 형식이 명료하고 내용에는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묵직한 메시지를 쉽게 전달한다. 이전까지 그의 사회 비평서들이 중심 주제를 갖지 않는 옴니버스 식의 글 모음이었던 반면, 이 책은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에 조직화된 구성을 갖고 있다. 짜임새 있는 고전 작품을 한 편 감상한 듯한 편안함과, 어느 부분 부터 읽어도 명쾌하게 읽히는 흥미로운 디테일을 동시에 가진 수작이다.

이 책은 한국인의 습속(Habitus)에 관한 연구서이다. 민족성이나 정체성이라는 표현은 비난의 뉘앙스나 규범을 설정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저자는 단지 행동과 사고방식에서의 차이를 드러낸다는 뉘앙스를 가진 습속이라는 말로 책의 주제를 설명한다. 한국인의 습속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좋고 나쁨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단지 습속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주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국인들은 전후 경제발전 시기를 겪으면서, 직업생활을 비롯한 사회생활의 양식은 빠른 속도로 근대화 되었다. 농촌의 생활양식을 갖고 있던 한국인들은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규범에 맞게 일하는, 군대식으로 기계화된 신체로 자신을 변형시켰다. 그러나 사고방식과 인간관계의 행동양식에서는 전근대의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삶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국인들은 지적인 도전보다는 열정을 선호하고, 극적인 감정을 자주 드러낸다. 저자는 이런 습속을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차이로 이해한다. 구술 문화에서의 대화는 정보나 사상을 전달하기 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며, 내면의 규범에 의존하기 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관심을 갖는다.

누군가는 한국인의 이런 정열적인 습속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상과 논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첨단산업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이런 한국인 습속은 IT세대를 맞아서 새롭게 변주될 뿐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정보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교감의 대상을 찾아 감정을 표출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많다. 한국은 IT소비의 선진국일 수는 있으나, IT기술을 창조적으로 생산하는 국가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한국의 IT기업들은 더 빠르고 더 큰 용량의 제품을 만드는 데에는 좋은 성과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지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앞으로도 북미를 비롯한 선진국의 몫이 되기 십상이다. 종교에서의 아우라가 파괴되고, 원본 없는 짝퉁이 유행하고, 우스꽝스러운 결혼식 건물로 상징되는 토털 키치가 21세기 한국인의 일천한 사고방식이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바로 이 말이 저자가 열정에 넘친다는 한국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충고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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