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한 것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것이 당신 단 한 사람이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한 것에 보람을 느낄 것이다. 아니, 이 글을 수많은 사람이 읽더라도 나는 당신 한 사람을 위해서, 당신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약자들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강자의 기억은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고 역사를 통해 기록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고 당당하다. 하지만 역사책을 펼쳐 보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고 그 인물이 그 인물인것 같지 않은가. 강자의 기억이란 사실은 지루한 패턴의 반복일 뿐, 삶의 내밀한 국면이 담겨지기란 쉽지 않다.

약자들은 희망과 좌절, 사랑과 증오, 승리와 패배, 삶과 죽음이 뒤엉킨 세계를 살아간다. 그들이 가진 삶의 에너지와 애환은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은 이 기억들이 전파되고 보존되도록 만들어져있지 않다.

남들이 기억하기 꺼려하는 약자의 기억을 고집스레 잊지 않고 있어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강자의 야만적 질서에 희생당한 인간성을 문학 안에서나마 보존하는 것은 양심적 지성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며, 동시에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함유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귄터 그라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비롯한 리얼리즘 작가들의 공통된 신조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살아온 주변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담아내었다. 그들의 업적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인정받았으며, 널리 읽혀왔다. 강자들은 이런 수단을 통해 작가 개인에 명성을 주었음은 물론이고, 야만의 역사에 대한 부족하나마 약간의 사죄를 대신해왔다.

이 작품들이 역사로부터 사죄를 받아내는 데에는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세월이 지나서 기밀해제된 문서처럼, 강자의 역사는 공소시효가 지난 범죄에 대해서만 사죄한다. 이 사죄는 이제 완전히 뉘우치겠다는 반성이 아니라, 그때 일은 너무 오래된 일이니 이제 그만 두자는 식으로 한 발 물러나는 요식행위이다. 한 쪽에서는 지난 일에 머리를 긁적이지만, 여전히 세상은 새로운 약자들을 억압하고 있고, 이들의 이야기를 기밀문서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 이제 막 한 세대가 지난 약자의 기록이 있다. 베트남 작가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의지로 일관되어 있다. 헬기와 폭격기로 무장한 미군과 소총으로 맞서는 베트남군의 싸움을 베트남군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잔혹한 일이다. 너무 짙은 아픔은 기억하기보다는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인공 빈은 황천강을 건널 때 먹는 망각의 죽을 먹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은 침략자의 만행을 고발하는 기억이며,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인간성에 대한 짙은 신뢰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숭고가 뒤엉킨 그 기억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든 그것은 문학으로 조직되어 우리에게 주어졌다. 문학적 기교와 완성도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작품은 그것이 표현하려는 대상의 진정성과 소수성에 의해 가치를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비록 그들의 기억은 소수의 것에 불과하지만, 보편성과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이것을 기억할 의무는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특히 베트남 민족에게 미국 다음 가는 상처를 남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2001년 9월 11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속하게 미디어를 타고 배달되었고, 이것을 접하는 사람들은 애도를 표시하는 것 외에 한동안은 다른 수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저승으로 갔다는데 무슨 딴지를 걸 수 있으랴. 미디어가 '울어라'하면 울 수밖에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은 그 뒤로도 계속 죽어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은 어떠했는지, 마지막 순간 그들은 얼마나 긴장되고 두려웠을지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디어는 그저 사상자 몇 명이라는 숫자로 환원할 뿐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 몇 명의 귄터 그라스가 나와야 할 것인가, 또 몇 명의 반레가 나와야 할 것인가. 오늘 말없이 죽어가는 자들의 진실은 언제쯤 드러날 것인가, 왜 모든 것은 지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일까. 험한 곳에서 태어나 박복한 삶을 살다 간 모든 생명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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