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닷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 관해

http://www.youzin.com/blog/archives/000219.html 에서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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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관통하는 시선의 의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 관해

그녀가 방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다. 문을 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쓸쓸한 공기. 그녀는 그것을 외면하며 있는 힘을 다해 불을 켠다. 하루의 일상을 치루어낸 그녀가 낮과는 전혀 반대되는 표정으로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

이 순간, 또 다른 그의 방에서는 가득한 침묵과 20대의 젊은 남자가 하루동안 키울 수 있는 만큼의 최대한의 갈망을 가르며 자명종이 울린다. 그리고 아주 작고 동그란 망원경의 뷰파인더가 비로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겨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 너머의 그녀. 그러나 그 공간은 그에게는 사막과도, 영원과도 같은 거리이고 그가 그 공간을 뛰어넘어 그녀에게 다가가려면 그는 최초에 린드버그가 가졌던 만큼의 용기를 내야 한다.

토멕은 이렇게 밤마다 그녀를 훔쳐본다. 하루의 일상이 끝난 시간 새로이 시작되는 그녀의 힘겨운 싸움의 순간들. 모래시계처럼 그녀의 방에 침묵이 떨어져 쌓여가는 모습과 그녀가 그 속에 묻혀 힘겹게 몸을 뒤척이는 모습들. 그의 방의 자명종 소리처럼 그녀의 참묵을 깨뜨리며 방문을 여는 한 남자에게 그녀가, 그가 망원경에 매달리듯, 무너져 내리며 매달리는 모습.

그런 식으로 삶을 지탱해 가던 어느 날 밤, 집안에 들어선 그녀는 무언가에 의해 더 이상 견뎌낼 힘을 잃고 지푸라기처럼 테이블에 쓰러져 한없이 운다. 그 옆에는 주체할 수 없는 그녀의 절망처럼 테이블 위로 무기력하게 흰 우유가 쏟아지고...그 순간조차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어 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시선은 끝없는 성실함으로 낮 동안은 활기차고 공격적이기만 했던 그녀의 이면의 생을 바라본다.

곧 그녀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그는 그 무한과도 같았던 공간을 넘어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훗, 사랑을 믿는 어린 풋내기군. 사랑이란 게 진짜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지.' 요컨대 그녀는 상처입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때는 토멕처럼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그녀. 그러나 그녀 역시 삶의 어떤 단계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사랑을 믿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토멕 앞에서 옷을 벗고 그를 침대로 끌어당기며 그녀는 사랑이란 건 이런 거야, 사랑에 대한 환상 따위는 버려, 라고 냉소한다.

그는 그녀가 의도한 것처럼 그녀가 과거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그녀의 아파트를 떠난다. 그러나 고독한 밤이 오고, 그녀의 작전이 성공하여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토멕은 자살을 시도하고 침묵에 잠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멕을 향해 있던 시점은 그녀에게로 역전되어 토멕이 자신을 바라보았던 바로 그 방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망원경으로 자신의 방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어느날 밤,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절망감으로 한없이 울었던 어느 날 밤의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견딜 수 없었던 고독한 순간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그 순간 자신을 지켜주는 하나의 시선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흐르는 눈물 속에서 미소가 번지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진정으로 위로받는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 했으나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은 바로 그녀였다. 사랑 속에 구원이 있다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이란 바로 이 정도의 것이 아닐까. 외로운 삶을 지켜주는 하나의 시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불완전한 삶 속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위로받고, 구원받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세계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앞서, 각자의 고독에 몸부림치는 우리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길이 있다. 그 길의 좌우에는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건물들에는 이름없는 수 많은 방들이 어깨를 겨누고 들어서서 영원과도 같은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무심히 얼굴을 대하고 있다. 그 사이에 오가는 것은 미미한 바람일 뿐, 존재를 주장하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창에 죽은 듯이 걸려 있는 두꺼운 커텐 너머에는 어떤 고독과 절망들이 아우성치고 있는가. 자신의 감정에 완벽한 방음 시설을 갖추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여서 헤어질 때도 웃으면서 가볍게 안녕, 하고 돌아서지만 방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는 순간, 그 모든 <난 괜찮아>라는 예의상의 제스츄어들은 무기력해 지고, 우리는 테이블에 엎드려 한없이 울게 되는 것이다.

1996년 11월 17일 by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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