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되지 않는 세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 세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체 중의 하나가 영화인듯 하다. 영화는 원래 소리 없이 처음 만들어졌고, 유성영화가 나온 이후에도 음향과 음악으로만 소리를 표현하고 언어를 자제하는 경향이 한동안 이어졌다. 언어 없이도, 말하는 모양을 흉내내는 동작이나 자막조차 없이도 영화는 충분히 복잡다단한 사건을 꾸며내고 펼쳐낼 수 있다.
<부드러운 흙Soft for Digging>은 이런 영화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는 산에 혼자 사는 노인이 숲 속에서의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미스테리에 빠져드는 전형적인 틀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상과 내재음으로만 이야기한다. 배경음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과도하게 분위기를 조장해 어색한 공포분위기로 몰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음향들은 모두 화면 안에 있다. 부글부글 끓는 달걀, 시끄럽기까지 한 냇물, 샤워기에서 나오는 강한 물소리.......
시종 무거운 분위기로 몰고갈 경우 관객이 긴장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부분을 삽입하여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센스도 발휘한다. 공포와 웃음이라는 정말 안 어울릴 것 같은 한 쌍이 이 영화 안에서는 그럴 듯하게 맞닿아 있다.
힘있고 개성있는 결말이 아쉽긴 하지만, 21세의 젊은 감독의 졸업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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