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흔적

나는 어디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본다

텃밭에 나가 귀퉁이가 찢겨진 열무 잎에도 대보고
그 위에 앉은 흰누에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햇빛 좋은 오후 걸레를 삶아 널면서
펄럭이며 말라가는 그 헝겊 조각에도 대보고
마사목에 친친 감겨 신음하는 어린 나뭇가지에도 대보고
바닷물에 오래 절여진 거은 해초 뿌리에도 대보고
시장에서 사온 조개의 그 둥근 무늬에도 대보고
잠든 딸아이의 머리띠를 벗겨주다가 그 띠에도 슬몃 대보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의 옷을 털면서 거기 묻어온
개미 한 마리의 하염없는 기어감에 대보기도 하다가

나는 어디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이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지만
참 알 수가 없다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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