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세계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진다. 감각기관을 통한 지각의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관념적인 실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오로라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나 Model-View Controller 디자인 패턴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의 존재여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의식의 외부를 구성하는, 실체들과 그들의 운동법칙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세계는 그러므로 언제나 그 세계를 표상하는 의식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인 '누군가'가 떠올리는 세계만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주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고, 세계 속에서 행동한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주체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에 관한 지식은 단지 주체가 받아들이고 판단해서 반응을 내놓아야 할 입력값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재료와 판단양식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지식은 단지 사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체에게 의미있는 것을 규정하는 지도이다. 그래서 세계는 주체에 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한편으로, 주체는 자신이 표상하는 세계 안에서, 세계를 향해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에 주체가 의지를 투입하여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가리킨다. 세계는 주체를 만들고, 주체는 세계를 만드는 고리 속에서, 세계와 주체는 분리되지도, 종합되지도 않는 공진화 과정을 통해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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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테두리가 곧 나의 테두리이다.


2003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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