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소유

사람들은 그들끼리 살게 되면서 많은 것들을 갖는다. 이름을 갖고, 돈을 갖고, 집을 갖고, 운전면허를 갖고, 애인을 갖고, 조국을 갖고, 심지어 누구의 외동아들이란 속성도 갖는다. '갖는다'는 말은 이 예들에서 각각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지만, 맨 처음 말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이름(기표)들 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표상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다종다양한 소유물들은 모두 이 이름을 기준으로 연관을 맺는 것이다. (소유자 자체와 직접 연관을 맺는 것이 아니다. '소유자 - 소유자의 이름 - 소유대상의 이름 - 소유대상' 의 방식으로 간접 연관을 가진다.) '꽃을 꺾었다'라는 말은 언어 밖의 세계에서 꽃이 꺾이는 변화를 겪어야만 참이다. 그러나 '꽃을 소유했다'라는 말은 참인 것으로 인정받더라도 꽃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소유는 언어 안에서만 일어나는 관계이다. 그래서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름이 필요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름만 필요하며,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름 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소비하면서 어떤 활동을 하기 전까지는 돈을 갖지 못한 상태일 때와 존재 양식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로 연인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연인으로서의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독신과의 차이가 없다. '애인'이라는 이름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인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은 돈을 가졌다는 사실이나, 프로포즈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하는 활동, 사랑을 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소유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용이한 것은 현실적인 맥락에서 사실이다. 책을 가지면 지혜로워지기 쉽고, 운전면허가 있으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가 좋다. 그럼에도 우선하는 것은 소유보다는 삶이다. 소유하는 것이 삶에 보탬이 되기 쉬운 것은 대부분의 행동반경이 소유 중심으로 맞춰져 있는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특징이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관심을 두라는 말은, 흔히 말하는 '결과 보다는 과정'이라는 표현과 유사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이 표현으로 대체해서 사용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결과가 아주 중요하다. 다만 '통계학 과목에 A를 맞았다', '새 컴퓨터를 얻었다'는 식의 소유양식의 결과가 아닌 '통계적 사고를 실제에 적용한다', '편하게 인터넷 검색을 한다'라는 존재양식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소유양식의 결과를 얻는 것은 존재양식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신중하고 집요하게 성공적인 결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2003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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