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가 등장하고, 그의 말벗이 되어주는 수녀가 등장한다. 사형제 폐지론자들과 찬성론자들이 등장한다. 집행일은 다가오고, 사형수는 사면을 위한 절차들을 준비한다. 영화<데드 맨 워킹>의 이야기가 출발하는 지점은 여기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설정 아래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라. 예고된 죽음을 앞둔 죄수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인간적인 시선을 보내려는 휴먼드라마가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장단점을 짚어내는 참여영화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사형 집행을 면하려는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투쟁장면을 그린, 결국 극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여 끝나는 오락영화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만들기의 패러다임을 택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감상자에게 사형제도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상자의 동정심을 얻기엔 사형수는 너무 거칠고 매력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집행 면제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은 너무 허무하게 실패해 버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이해'에 관한 영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들이 사실은 얼마나 높은 불신과 몰이해의 벽을 두고서 일어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불량배가 연인을 살해하고, 다시 사회가 그를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비극은 그 한 예로써 보여진다. 사형수 매튜는 살해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대놓고 나치즘에 동의하거나 인종주의적인 생각을 내비친다. 그런 그를 피해자의 가족들은 악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을 갖지 못한 존재이므로 인권에서 열외되어 죽어 마땅하다고 외친다. 이 긴장 속에 던져진 인물이 수녀 헬렌이다. 헬렌은 그들 모두의 비극을 사랑의 시선으로 감싸안으려고 하지만 모두가 내 편 아니면 네 편으로 분명히 선을 긋고 대립하려는 구도 가운데에서 철저한 몰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헬렌의 임무는 매튜를 살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서로를 이해시키는 것이 되었다. 비극으로 상처받은 그들의 야수성을 걷어내고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매튜는 사형이 집행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작지만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매튜는 스스로 속죄하고 있었으며,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의 선한 마지막 모습에 연민을 느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섬세한 리얼리즘에 있다. 현실 속의 많은 갈등은 선악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살인자가 나쁜 놈", 혹은 "사형제는 나쁜 제도"라는 식으로 표현하기가 너무나도 쉬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저 비극은 비극으로만 그리는 것은 놀라운 점이다. 집행을 면하게 하려는 시도가 맥없이 번번이 실패하는 것도 전혀 '극적'이지 않을 뿐더러, 헬렌의 활약의 성과라는 것도 감질날 만큼 미미하다. 이것은 이 영화가 매력적이게 하는 아주 세련된 연출이다. 헬렌이 수퍼우먼같은 능력을 가져서 대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얼싸안고 화해를 한다면 한참은 유치해질 것이다. 언제나 욕심만큼 이뤄지지 않지만, 정직한 노력으로 얻은 아주 작은 성과들을 소중하게 모아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