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다 가세요

내 생각엔 말이지, 바쁜 사람이 창조적이라는 것은 호랑이가 단추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고 봐. 바쁘다는 것은 할 일이 많다는 건데,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하게될 지 미리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무어 새로운 것을 원하겠어? 해야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기특한 일일지는 몰라도 창조적인 순간은 그런 때에 나타나진 않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할 지경이 되어야 뭔가 새로운걸 찾기 마련이지.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이거나 해볼까? 아님 저거를 해볼까? 이러면서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임에 익숙해지면 그 때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거야. 가장 먼저 창조하는 것은 자신이 쓸 시간에 대한 계획이지. 그렇다고 학원을 수강한다던지, 직장을 다닐 계획을 말하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맡길 계획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나를 이끌어 갈 계획. 주말에 만날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다던지, 무언가를 꾸준히 연습을 할 것이라든지, 어디론가 여행을 갈 채비를 한다던지, 아니면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것까지도 이런 계획이야. 이런 일들은 해나가는 도중에 끊임없이 누군가와, 혹은 자신과 놀이를 하게 되는데, 그 놀이란 뻔할 수록 재미가 없지. 그 놀이가 놀이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무언가 전과는 다른 방식을 찾게 되는거야. 이런 일들은 전혀 마음을 조급하게 하지 않고 즐겁게 해. 사실상 상당히 많은(그리고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바쁘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아. 그러고 보면 바쁘다는 것은, 하는 일의 양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일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는 내 일의 노예에요, 그저 해치우고 있을 뿐이에요.

고등학교 때 문학선생님었던가 국어선생님이었던가...어쨌든 어떤 선생님이 결근을 하셔서 다른 반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들어오신 적이 있어. 그 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 소설은 달리면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절대 달리면서는 읽히지 않는다. 시험 볼 때 아무리 시간이 급해도 시는 음미할 여유를 갖고 읽어야 한다. 단 한 시간의 수업이었을 뿐인데 난 이 말이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이 나.


200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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