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시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빠를까? 배우는 사람의 특별한 재능을 평준화시키고 생각한다면, 시가 더 수월할 것 같다. 둘 다 재료를 독특한 방식으로 조합해서 배열하는 놀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시가 관념을 재료로 구성하는 반면 음악은 소리로 구성한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와 같이 낮선 개념이 없는 경우, 낱말 각각의 의미를 떠올리는 데에서 시작해, 낱말들간의 관계가 나타내는 특별한 매력을 파악하는 데까지 단계적으로 올라가기가 쉽다. 하지만 '도미솔시도레도'는 어떤가? 각각의 음에 익숙해 있다고 하더라도, 음들이 이루고 있는 관계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감상에 이르기까지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게다가 우리가 익숙한 서양음악에서의 음계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 음악이라면 그 난해함이란 말할 것도 없다. 음악은 차근차근 접근할 만한 계단이 시에 비해 많지 않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시보다는 음악을 훨씬 익숙하게 감상하고 있는데, 그건 도처에서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이 즐겨 듣는 좁은 장르만을 선호하고, 다른 어법을 가진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워하는 것처럼, 음악은 결코 감상하기 쉬운 종류의 예술은 아니다.
낮선 음악보다 낮선 시가 더 접하기 쉬우면 그럼 왜 시집보다 음반이 더 많이 팔리는 걸까? 그 이유중 하나가 음악은 '들려올'수 있지만 시는 머리를 써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음악이 귀를 길들이고, 익숙한 귀가 다시 대중음악을 찾게 되는 순환구조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버스기사가 틀어둔 라디오 방송은 안 들을래야 별다른 방법이 없지만, 지하철역에 드문드문 걸린 시들은 차 기다리기가 아주 심심하지 않은 다음에야 눈길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대중은 연주곡보다는 가사가 있는 음악을 더 좋아한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부르는 것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부르는 노래를 더 좋아한다. 대중은 가요를 평가할 때 '전개구조가 뛰어나다'거나, '멜로디가 아름답다'라는것 보다는 '가사가 마음에 든다'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가사로 먼저 도움닫기를 하고 음악에 이르는 것이다. 대중가사와 시집에 실린 시는 앞에서 내린 시에 대한 정의상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런 면에서 음반은 이미 시를 포함하고 있고, 대중은 이미 충분히 감상하고 있다.
음악에 쓰인 음표(혹은 음표로 나타낼 수 없는 소리까지)들은 단지 그 음악 안에서만 연관관계를 가짐으로써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특이한 음계라고 하더라도 들어서 익숙하고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어떤 음악을 패러디한 경우라든지 주제와 등장인물을 연관지은 바그너의 오페라나 음악을 듣기만 해도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를 만한 유명한 영화음악 같은 경우는 예외적으로 작품 외부와도 연관을 갖는다.) 하지만 시어는 작품 안에서 갖는 관계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들을 이미 갖고 있는 재료다. 다다이즘 시가 아니라면, 듣기 좋게 음표를 조합하듯이 듣기 좋은 자모를 조합하는 것만으로 시가 지어지지는 않는다. 시인은 이미 풍부한 기존의 쓰임새를 가진 낱말들 중에서 특정한 관계를 부각시키거나 변형시키는 일을 시를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어에서 의미(외시 의미든 내포 의미든)를 꺼내지 못하면 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쓸데없이 어려운 시어로 겉멋든 시를 억지로 읽으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시는 쉽다.
2002년 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