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postmodern!

동생 책꽃이에서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백수십 가지의 대립쌍을 이루는 범주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짧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철학자들과 같이 그 범주표가 완전하다거나 종합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단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영원히 수정되지 않을 완벽한 범주표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과 적용사례에 따라 범주의 추상 단계는 펼쳐졌다 접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범주들을 나열해 보는 사전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더라도 세상의 한 부분을 바라보는 틀로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대립쌍들이 있다면 이 범주표에 한 수 거들어도 좋으리라. 새천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뚜렷해지고 있는 대립쌍 중에 하나로 나는 단일성과 다원성을 들고 싶다.

종래의 의사소통 구조는 대부분 단방향적이었다. 선후배, 부자, 사제, 국가와 국민, 언론과 독자, 정상인과 장애인, 사용자와 노동자 등등. 전체주의적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는 이런 소통구조가 유지된 것은 발언하는 쪽의 명시적인 억압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수용하는 쪽에서 이 구조를 상당부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에도 원인이 있다. 이런 자발적 수용의 저변에는 가난, 무지,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헤게모니 이외에도 소통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없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다원적인 소통을 요구하는 사람은 소수였고, 그들이 치열하게 이론과 실천으로 싸워왔어도 주장을 결정적으로 파급시킬 만한 매체가 없었다. 저항에 성공하는 아주 드문 경우에는 그들의 주장이 절대다수를 대표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일시적으로 방향이 전도되었지만 그때의 소통 역시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경우였다. 다수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소수들이 갖는 특수성에 대해 발언하기를 유보한 결과를 우리는 지난 10년에 걸쳐서 봐왔다. 적을 이기기 위해 적을 닮아버린 셈인 것이다.

이제 환경이 변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술이다. 우리모두와 오마이뉴스는 인터넷을 바탕으로만 나올 수 있는 소통구조이다. 이런 방식은 얼핏 혼란스럽고 비체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기존에 비교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소통이 가져오는 생산성은 기존 매체들도 표면적으로나마 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제는 홈페이지가 없는 언론, 기업, 사회단체, 학교가 없다. 정치적 행사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고, 원칙적으로 단방향인 TV도 토론프로그램이나, 프로그램마다 인터넷 게시판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소통구조를 다원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꿋꿋하게 일방적 전달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신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분보다는 실리적인 쪽으로 줄을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원성에 돈을 걸기 바란다. 단일성을 고수하는 쪽은 곧 고립될 것이다. 이것이 비민주적이어서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만 주장을 전달하는 것이 이제는 더 힘들기 때문이다.

200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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