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던 날
늦었다. 개강 첫 날부터 늦잠을 잤다. 지난 밤엔 열한 시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려 아홉 시간을 자다니! 아침을 거르고 얼굴에 물만 대충 묻힌 뒤에 옷을 갈아입는다.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오고 있다. 밤새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등교시간이 더 걸릴텐데'. 그러면서도 촉박한 시간에는 아랑곳않고 가방에는 설경을 찍을 사진기를 넣고, MP3플레이어에는 재주소년의 '눈 오던 날'을 넣는다.
허겁지겁 연구실에 닿았다. 다행히 5분 정도밖에 지각하지 않았다. 도착하니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다짜고짜 실습실 조교를 들어가라는 지시가 방장 형으로부터 떨어졌다. 해 보지도 않았고, 내가 하기로 돼 있는 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인데,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나왔다. 학생들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된다. 강사가 나보고는 수업 중에는 나가 있으라고 한다. '원래 그런건가? 그럼 난 어디로 가지?' 연구실로 돌아가거나 전화로 방장 형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형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듣기 싫다. 늦은 아침밥이나 먹으러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전이라 식당은 한산하다. 좁고 침침한 연구실에서 부대끼다가 오랜만에 혼자 학교에 있게 되었다. 2200원짜리 세트 메뉴를 사다가 밝은 창가에 앉았다. 따뜻한 햇빛이 내리쬔다. 그렇게 많이도 쌓였던 눈이 따뜻한 기온 탓에 벌써 꽤 녹았다. 매순간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쌓아온 긴장이 함께 녹는다. 눈물이 떨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지나간 기억을 뒤적여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 가방을 열어 본다. 책과 구겨진 종이쪽지들 사이로 개봉 영화 리플렛이 하나 나왔다. <여자, 정혜>. 뒤적거리다 보니 왠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속삭여 본다. 이젠 행복해질 거라고'. 영화 카피와 함께 다시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혼자 가서 볼까, 누구와 함께 갈까.
리플렛 옆으로 꼬물꼬물 뭔가를 써 둔 쪽지가 보였다. 인간 군상들과 내 이야기를 적어놓은 미완성 낙서다. 언제 이런 걸 썼더라. 건조한 문체에 얄팍한 내용을 읽고 있노라니 피식 웃음이 번진다. 연필을 꺼내 먼저 써 둔 글에 줄을 쭉 긋고 다른 글을 쓴다. 처음부터 뭉툭했던 연필이 점점 더 무뎌져 간다. '늦었다. 개강 첫 날부터 늦잠을 잤다.'로 시작하는 일상의 이야기는 어느덧 빼곡하게 종이 한 장을 채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