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힐리즘
가치관이란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취향에 가까우며 순간순간의 감정에 휘둘리기까지 하는 희한한 녀석이다. 이것을 누가 경험 이전에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누구나 하루쯤은 실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앓는다.
피할 수 없는 위기를 관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것이다. 이것은 몰두하던 일이 갑자기 허무해지는 순간이 올 때 자신을 지키는 원리로서도 유용하다. 소중한 것들을 여러 개 가지면, 종 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처럼, 한 쪽이 균형을 잃어도 이내 새로운 균형지점을 찾아내는 일을 할 수 있다.
한 가지 가치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사람이 어느날 표변하여 정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경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양쪽 극단은 다른 차원에서는 서로 만나 있다. 무엇을 신봉하든, 그 사람은 절대적이고 강력한 믿음을 원했던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자기부정은 새로운 다른 정체성을 세우기에 힘들고, 발전도 더딜 것으로 생각된다. 복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편이 덜 고통스러우며,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003년 9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