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 막바지 자평

정말 마음대로, 되는대로 지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나가 놀고 싶으면 놀고... 긴 시간의 기억을 몇 마디 글로 종합해 버리고 시지는 않지만, 나중에 지금의 자취를 더듬는 데에 이 글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글을 정말 많이 읽었다. 잠깐 사이 책장 하나가 생기고 새 책으로 가득 찼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 읽는 연습이라는 점에서 큰 보람이 있었다. 글 속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은 글이 아닌 다른 텍스트에서 의미를 찾는 데에도 요긴하다. 온통 기호로 뒤덮힌 세상에서 작으나마 의미를 읽는다는 건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같은 거창한 신선놀음을 인간놀음으로 즐기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연습'. 동아리에서 배운 중요한 가르침이다. 연습하지 않고 되는 일이 있을까? 걷기, 밥먹기 같은 단순한 것도 원래 연습의 성과라는 것을 우리는 잊기 쉽다. 어쩌면 숨쉬기조차 태어났을 때 열심히 연습했기 때문에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동안은 의식적이고 끊임없는 연습의 연속이었다. 연주하기, 글 읽기와 쓰기, 생각하기, 대화하기, 듣기, 보기...그리고 요리 연습도 배놓을 수 없는 그간의 노력이다.

그동안 꽤 많은 시간을 혼자서만 지냈다. 처음 몇 주간은 혼자임이 두려울 정도로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마음에 들여놓은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안다. 혼자 내면에 심취하는 자의 편협함을. 하지만 여럿이 모일 때, 모인 이들의 수만큼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깎여 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성원들이 각자의 내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게 소통할 수 있는 집단에 속하고 싶다.

다행히도 이런 소망이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이루어졌다. 많지는 않지만 몇몇 친구들과 깊이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을 당신도 내겐 아주 소중한 사람이다. 가족은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이야기를 당신은 많이 알고 있다. 그만큼 흉금없는 친구가 또 있을까?

어린 시절에 훌륭한 사람들의 전기를 많이 읽어두라는 이야기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권하는 전기의 위인들이란 왜 고작 민족주의적으로 채색된 영웅이거나 흔해빠진 천재일 뿐인가. 능력에 감탄하고 고마워할 지언정 존경이라는 낱말을 붙일 대상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동안은 여러 미디어 속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 마음으로 존경할 두 사람을 찾았다. 진중권, 신해철.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일을 해내고 있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것처럼 너희들도 각자의 길을 발견하고 헤쳐나가라고, 실천으로써 가르쳐주는 것 같다.

휴학을 결심할 때에는 이런 것들을 얻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짜여진 시간표 같은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치밀한 계획하에 행동한다는 것은 얻고자 하는 결과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그 이외의 결과는 실패라는 걸 의미한다. 몇 가지 전망만을 가지고 자유롭게 뭐든 하다 보면 얻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 결과가 바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수확이다.


2001년 11월 26일

pocorall 님이 November 27, 2001 4:45 AM 에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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