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주목하고, 또 다른 사람은 운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두 시각은 서로 모순인 것 같아 보이지만, 모두 중요한 진리를 포착하고 있다. 인생은 참으로 자신의 노력과 선택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된다. 막연하게 바라고만 있거나 어딘가에 빌고 있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망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조치를 취한다면 성취감과 보람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의지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라는 것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규정지어져 있고, 그 범위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원하는 음식을 고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지만, 아무 음식이나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이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메뉴판에 적힌 음식 안에서 골라야만 한다. 이 메뉴판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듯, 우리의 삶은 선택이며 운명이다.
제약 속의 자유라는 이런 독특한 상황 안에서, 우리는 삶의 재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짬뽕을 먹을까 짜장을 먹을까 고민하는 즐거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짬뽕을 먹든 짜장을 먹든 별 상관 없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짬뽕과 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고, 뭘 먹든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뭔가를 먹으러 왔다는 것 조차 무의미할 수도 있다. 인생의 메뉴판에서 선택을 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즐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메뉴판은 다양체다. 메뉴들은 각기 차이점을 갖고 있고, 메뉴판은 그 차이들의 조합으로서 존재한다. 차이에 대해 잘 알고, 차이들을 음미하자. 결국 삶은 차이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며, 염세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성취는 차이에 위계를 만든다. 백두산 정상도 지구상의 한 지점일 뿐이며, 오르면 이내 내려와야 하듯, 성취하는 것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삶의 의미는 성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이들을 즐기는 여정에 있다. 변주곡을 써내려가는 작곡가처럼, 운명과 선택 사이에서 흥겨운 줄타기를 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