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단어들

멀티미디어
90년대 후반에 멀티미디어라는 표현이 한창 유행이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일 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매체로 동시에 제공되는 복합매체라는 뜻이다. 사진과 텍스트가 같이 나와도 멀티미디어는 멀티미디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보처리기술이 발달하면서 복합 매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목해 보자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의 삼성’과 같은 선전문구는 삼성이 무슨 멀티미디어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인지 모호하고 (TV나 VHS가 멀티미디어 매체인가? 맞다고 본다면, 그게 뭐가 새로운걸까?), ‘멀티미디어 PC’등의 문구에서 말하는 멀티미디어는 사실은 CDROM드라이브가 장착돼서 Video-CD를 플레이할 수 있는 PC를 말하는 것이었다. 유행은 하는데, 사전적 의미와는 상관없고, 정작 알멩이는 별거 아닌데 겉만 번지르한 표현이었다.

UCC
원래는 사용자가 만들어서 배포하는 저작물이다. 저작했으면 저작자지 사용자는 또 무슨 소릴까? 조금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사용자가 곧 저작자도 되는, 누구나 만들고 사용하는 저작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UCC는 기자, 작가, 감독 등의 직업적인 저작자가 만드는 저작물과 구분되는 저작물의 형태이다. 이 용어는 2006년부터 Daum에서 유포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러면서 마치 인터넷의 새로운 경향이 도래한 것 같은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버렸다. 하지만 UCC가 정말 2000년대 중반에 갑자기 등장한 것인가? 디씨인사이드에 글을 올리면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든 사람들은 직업작가인가? PC통신 게시판에 짬짬이 연재되던 소설들은 편집장이 의뢰해서 연재한 것인가? UCC라고 불릴 수 있는 저작물들은 PC통신이 보급되던 당시부터 국내에 있던 것들이었다.
Daum이 UCC라는 용어를 유포하기 시작한 맥락은, 포탈사이트에서 신문기사 등의 전문저작물 비중을 다소 줄이고, 사용자들이 만든 저작물을 좀 더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방침에서, 일종의 마케팅 구호로 내세운 것이다. 규모의 경제가 관건이 되는 전문저작물 제공으로는 NHN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나온 차별화 전략이다.
때마침 인터넷에서 동영상 유통이 활발해졌는데, UCC유행과 맞물려서 인터넷 동영상==UCC라는 등식이 세워져 버렸다. 멀티미디어가 사실은 동영상 재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경향이다. 꼭 10년 만이다.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Windows XP에서 XP는 eXPerience의 줄인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UI(User Interface)라는 용어보다는 UX(User eXPerience)를 유포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경험은 시원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인터페이스’라는 단어는 동등한 두 개체 간의 소통방법이라는 상호작용성에 주안점이 있는 반면, ‘경험’이라는 단어는 주체가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되는 정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인간중심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뉘앙스가 그렇다는 것이지, 어떤 소프트웨어를 두고 ‘이것은 UI가 있는게 아니고 UX가 있는거야’라고 분명하게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일단 MS는 이 단어를 특정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고, 용법에 따라 해당 단어의 의미가 규정되어 가고 있다. 이미지와 애니메이션을 많이 써서 좀 더 화려하고, 사용성을 더 고려해서 편리하게 배치해 놓는 UI를 MS는 UX라고 부른다. 오피스 2007에서 가장 중요한 개선은 기능보다는 UI이고, 이것은 최근 어플리케이션의 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써서 만든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UI를 개선했습니다’라고 말하자니, UI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고풍스러운 것이 문제이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좀 더 세련돼 보이는 단어로 선정된 것이 바로 UX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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