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가 어느 커다란 진실 또는 유명한 대성당의 이름에 부닥치거나 하면, 그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러고는 기원, 돈호법, 긴 기구 속에 그 발산하려고 하는 것을 마음대로 발산시키고 있기 때문인데, 그 발산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산문의 안쪽에 머물고 있어서 그 표면의 파동이 일고서야 비로소 드러날 뿐, 그 표면의 파동이 처음처럼 가려져 있을 때, 그리고 그 살랑거림이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뚜렷하게 가리킬 수 없을 때, 그 파동은 아마 아직 잔잔히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즐겨 하는 그 독특한 부분이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나로 말하면, 그런 부분을 암기하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시 잇기 시작할 때 나는 실망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베르고트라는 작가의 글솜씨를 기리는 대목 중에서 뽑은 것이다. 소설 속 베르고트의 작품 뿐만 아니라, 프루스트의 이 작품 또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잇다 말고, 마음의 드는 풍경을 발견하거나 인물의 습관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를 때면 봄꽃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등교길이었던 것을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그것들을 그리는데 열중한다. 누구나 보지만 흘끗 보아 넘기기만 하는 길가의 꽃처럼, 매일의 주변에 있는 작은 것들을 꼼꼼하게, 애정을 담아서 표현하는 묘사 속에 이 소설의 속 깊은 매력이 있다.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세심하게 보존해 주는 이러한 묘사를 지탱하기 위해, 어쩌면 줄거리는 버팀목으로서 잠깐씩 등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 학급에 가서는 주로 베르고트의 사상만으로 살아, 다른 것은 하지 않기로 마음 정하고 있어서, 만일 그 학급에서 내가 집착하게 될 형이상학자들이 그와 하나도 닮지 않은 인간일 거라고 나에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면, 한평생 한 여인을 사랑하려는 연인이, 후에 가서는 다른 몇 애인을 가질 것이라고 놀림을 받을 때와 같은 절망을 나는 느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은 이제 소설의 첫 대목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수분이 부족할 때 물을 찾고, 체력이 부칠 때 단 것이 생각나듯이, 이 길고 느린 소설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전엔 어렸고 나중은 늦는다. 사교계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프루스트가 고독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옛 시간들을 복원한 아름다운 장면들은 내가 때때로 사무치게 그리워하곤 하는 지난시절을 잘 투영해줄 프리즘이 될 것만 같다. 길고 긴 분량은 압도당한다는 느낌보다는 포근한 기대감을 돋구는 데에 한 몫을 거든다. 끝까지 가도 좋고 중간에 그만 두면 또 어떤가. 풀 한포기 소홀하지 않은 훌륭한 산책길은 거니는 것만으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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