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거울 전쟁

어느 점을 기준으로 대칭인 세계가 있다. f(x)=g(-x)의 공식을 엄격히 따르는 그 곳에는 항상 두 개의 사물이 존재한다. 세계의 남동쪽에 북풍이 불면 북서쪽에는 남풍이 불고, 남쪽의 고양이가 북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다보면 북쪽의 고양이는 남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대칭되는 곳에 살고있는 국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예전부터 이어왔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한 모습을 띄고 있는 상대방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한 쌍의 사람들은 항상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데, 그 유한한 자원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분쟁이 생기는 것이라고도 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특허, 학문상의 업적이나 스포츠 기록과 같이 시간을 다투는 성과에 대해 항상 대칭점 반대편의 대상과 순위를 공유하게 되는 것에서 앙심이 싹튼다고도 했다. (이 주제를 다룬 논문도 서남쪽 교외의 대학과 북동쪽 교외의 대학에서 같은 날 같은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두 쌍의 사람들간의 적개심은 역사가 깊어가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그 기원에 대해 밝히는 일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쪽 부족과 북쪽 부족끼리, 동쪽 부족과 서쪽 부족끼리만 전쟁을 벌이고 남쪽 부족은 서쪽과 동쪽 부족 모두와 교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남쪽 부족의 부족장이 서쪽 부족의 부족장과 만나고 있는 동안 북쪽 부족의 부족장은 동쪽 부족의 부족장과 만나고 있었다는 첩보가 전해진 뒤부터는 남쪽 부족과 서쪽 부족이 군사 연합을 결성하였고, 이와 동시에 북쪽 부족과 동쪽 부족도 군사 연합을 결성하게 되면서 세계의 대결양상이 더욱 뚜렷하게 양분화되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을 무렵 전쟁은 대칭의 원점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 원점에서 멀어질수록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좆고 있을 뿐 적을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가 편을 분명하게 갈라 대립하게 되면서 전선이 뚜렷해지고, 로켓포와 같은 원격 무기가 개발되면서 전쟁은 어느곳에서든 가능하게 되었다.

김 상병은 방어선이 무너진 적의 도시에 잔존한 적군을 소탕하는 작전에 참여중이다. 그의 부대는 시가지를 횡단하던 중 인근의 한 건물로부터 저격을 받았고, 동료 한 명을 잃었다. 그는 건물 3층에 몸을 숨기던 저격수를 발견하고 로켓포를 날렸다.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그는 총을 굳게 쥔 채 조심스럽게 건물로 잠입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그곳에 있었고 손에 무기를 든 채 심하게 손상된 시체도 있었다. 가족들은 몹시 겁에 질린 얼굴로 김 상병을 바라보았다. 김 상병은 그들이 적국의 주민으로서 방금 사살된 적군을 지원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미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날 김 상병의 약혼자가 사는 도시는 적군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었다. 약혼자의 집에는 아군의 저격수가 있었는데, 적의 대응공격으로 폭격을 맞았다. 김 상병의 부대 전체가 승리에 도취된 날 밤, 그는 약혼자와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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