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뿌리들 1>

<개념-뿌리들>은 철학자 이정우의 철학 입문 강의를 엮어 낸 책이다. 철학이라는 분야의 기본 개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의미가 시대와 맥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차근차근 안내한다.
의자, 가로등, 달리다...와 같은 일상적 개념들과 자기장, DNA, 한계효용 등의 전문적 개념들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 것이 철학적 개념들이다. 일상적 개념은 엄밀히 정의되지 않더라도 뜻이 잘 통하고, 전문적 개념은 제한된 분야 내에서 비교적 잘 정의되어 이견이 적다. 하지만 우연, 가능성, 시간...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은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정의가 어려워지고, 맥락에 따라 여러가지로 규정된다.
철학적 개념들은 여러 담론들이 겹쳐지는 영역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복잡하고 모호하다. 철학적 작업은 이런 개념들을 비판적,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담론영역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존 개념을 재규정하는 방법도 빈번하게 쓴다. 이 강의록에서는 수천 년간 변화해온 철학적 기본 개념들의 변천사를 다룬다.

1강. 원리原理, 원인原因

사람들은 살면서 무언가가 '가짜'라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덧없거나 사물의 표층이 아닌, 믿을 만하고 영원한, 진짜의 것을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는다.
그리스어 아르케arche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아르케는 근원, 원리라는 낱말로 번역될 수 있다. 플라톤은 아르케를 '(다른 존재에 의해)생성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앞에 있는 것이 근원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몇 가지 정의를 제시한다. '각 사물을 위한 최선의 출발점', '(한 사물의) 생성의 일차적이고 내재적인 요소', '한 사물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 첫 번째가 출발점으로서의 원리를 말하고, 두 번째가 존재론적 맥락의 원리, 세 번째가 인식론적 맥락의 원리를 말한다. 원리에 대한 탐구는 학문의 출발점으로서 강력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원리에 대한 탐구가 갖는 지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원리는 구체적인 것들의 의미를 억누르고, 보편적인 것들로만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원리와 함께 학문적 탐구의 핵심 개념으로서 '원인'이란 개념을 들 수 있다. 원인은 사건들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결정론determinism인데, 끌로드 베르나르는 이것을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본다. 현대에 와서는 이 개념도 중심주의를 함축한다는 면에서 어느정도 비판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본적인 원인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이다. 물질적 바탕을 이루는 '질료인', 사물에 대한 규정성을 말하는 '형상인', 사물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인', 사물을 미래로 끌어당기는 '목적인'이 그것이다.
근대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를 비판한다. 목적론적 사고는 물질세계를 의인적으로 표현하는 분위기를 갖기 때문이다. 근대 자연관이 지나치게 기계론적인 설명을 받아들인 데에 따른 것으로, 물리세계, 생명세계, 인간세계에서의 이것은 목적론이 갖는 역할을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형상의 차원이 있고 질료에 그것이 구현된다는 형상철학의 기본 도식도 근대 철학에서는 거부된다. 근대 과학의 기본인 법칙은 둘 이상의 힘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것은 형상에 비해 좀 더 경험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법칙은 관계들의 체계를 다루는, 구조에 대한 탐구(구조주의)로 이어진다.

2강. 자연自然

헬라스어 퓌지스physis는 우주 전체의 사물들을 가리키거나, 사물들의 이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을 구성하는 참된 원리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자들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신, 운동하는 것과 정지한 것 등의 문제를 다뤘다.
파르메니데스는 복수성과 운동을 부정했다.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일자一者 The One)가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고 했다. 당대 헬라스어에 밀접한 논증방식으로 뒷받침된 이 주장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실재를 찾는 학문활동의 정신과도 이어져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퓌지스는 일자 아래에 존재하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플라톤은 퓌지스를 주재하는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세계를 조물주가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 구도는 신의 개념을 도입한다.
히브리적 우주 제작설과 그리스적 우주 제작설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사유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지만 히브리즘은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세계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되고 자연은 이용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유구도를 초월적 자연관이라 한다.
초월적 자연관에 대비하여 내재적 자연관의 전통도 있다. 내재적 자연철학의 주역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자연이 곧 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양태라고 설명한다. 세계는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주관과 객관의 구분은 없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과학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기계론이 등장한다. 기계론은 자연을 역학적 개념으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과 영혼을 세계에 포함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데, 데카르트가 제시한 정신-물질 이원론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3강. 운명運命, 필연必然, 우연偶然

운명에 해당하는 희랍어 'moira'는 운명을 담당하는 여신 이름으로,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 개념에 가까웠다. 운명은 인간이 왜 그런지 모르고 받아들여야 하는 명령이다. 모이라에는 '~일 수밖에 없다'는 법칙적 필연성과 '~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ananke'는 필연이라는 의미의 희랍어이다. 신화적 의미에서는 냉혹한 법을 가리킨다. 오늘날 생각하는 필연의 의미(데모크리토스,기계론적 필연)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필연의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목적론적인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사유에서는 아낭케는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조건들을 말한다. 다시 말해 형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질료의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아낭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필요한 것, 어쩔 수 없는 제약, 논리적 필연성, 단순성
우연은 일종의 부차적인 운동인이다. 목적론자(플라톤)의 입장에서 기계론자(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을 우연으로 설명한다고 비판한다.
우연이 자연과학적 개념이라면, 우발성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우연은 완벽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데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자체가 우연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인식주체가 세계에 부딪히는 것 자체가 우연을 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계 자체가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발성은 이유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를 말한다.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우연은 결정론의 전제 하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발생을 뜻한다. 우연이 인간적인 의미를 띄게 되면 운명이 된다. 주관을 모두 배제하고 우주를 바라보면 세상은 필연과 우발성 뿐이다.

4강. 존재存在, 실재實在, 실체實體, 본질本質

'존재'는 헬라스 말의 on에 해당한다. 존재에는 '존재한다는 것'의 동사적 용법과 '존재하는 것'의 명사적 용법이 있다.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파르메니데스는 多와 운동을 부정하고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세계의 참모습으로 제시했다. 이 사고방식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을 비롯한 전통 철학과 자연과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플라톤은 세계를 多로서 파악했다. 모든 사물은 제각각 자신의 이데아를 가진다. 그리고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無를 인정하게 된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가 혼동했던 '아니다'와 '없다'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은 존재와 가치를 혼동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여러 가지 의미로 정리했다: 첫째, 자체로서의 존재와 그것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존재. 둘째, 진眞으로서의 존재. 셋째, 잠재태, 혹은 현실태로서의 존재.
근대에 들어서면 존재론적 관심은 인식론과 정치철학으로 옮겨간다. 칸트는 존재 자체는 인식할 수 없고 현상만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실재란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to ontos on)이다. 고대에는 실재를 비가시적인 것에서 찾았지만 현대로 올수록 현상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 개념을 거부해 버리는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있다. 실재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실재를 포기하기 보다는 실재를 복수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체 'ousia'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전의 철학자들이 개체들을 넘어서는 것을 실체로 보았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것들을 실재로 인정했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개별 사물들을 이루는 형상들을 더 근본적인 실체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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