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근대와 탈근대의 사이에서

서론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은 다니엘 디포가 18세기에 쓴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을 미셸 투르니에가 20세기에 다시 쓴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리얼리즘 소설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수기와 같은 형식이 그렇고, 자본주의와 기독교 윤리, 서구 중심의 개척정신으로 윤색된 내용이 또한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못했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고 <방드르디>의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원작의 대략적인 내용은 동화로써 유명하고, <방드르디>의 곳곳에 원작의 암시를 갖고 있으므로 투르니에가 어느 부분에서 200년 전의 소설과 차별성을 두려고 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근대소설을 다시 씀으로써 문학으로 근대를 넘어서려는 투르니에의 야심찬 시도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로빈슨은 어떻게 방드르디를 받아들이는가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대로 원양 무역선이 난파당해 홀로 무인도에 정착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빈슨은 혼자임을 알게 되자, 절망하여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버리고 진창을 뒹구는 동물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때 로빈슨이 포기한 것은 위생이나 건강이 아닌 그가 지금까지 익혀온 서구문명의 코드이다. 공유할 타인이 사라짐으로써 무의미해진 기호체계가 그의 오성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감각으로부터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 구성된 개념을 조합하는 것 따위는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해 보였다. 그는 '개념 없는 직관'의 맹목적 생활 속을 떠다니게 되었다.1)

그러나 그는 18세기의 영국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문화는 무인도에 사람이 혼자 남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2) 로빈슨은 이내 진창을 악, 노동을 선으로 규정하고, 물시계와 달력으로 날짜와 시간을 계량하고, 어디에 쓰게 될지 모를 잉여생산물을 저장하게 된다. 스페란자 섬은 먹을 걸 위해 애써야 할 만큼 식량이 부족하지도 않고, 재산으로 지배할 타인이 있는 것도 아닌 곳이다. 부지런하고 계산적으로 사는 것, 잉여생산물을 축적하는 것은 탐욕보다는 개신교 윤리에 바탕을 둔다. 풍요로운 수확물로 신의 은총을 확인하고, 그것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은 그 은총에 답하는 과정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투르니에와 디포가 구별된다. 로빈슨이 스페란자에서 육지 문명을 재현하려는 시도들을 그리는 투르니에의 시선은 계몽적이라기보다는 풍자적이다. 레비-스트로스로부터 문화인류학을 사사받은 바 있는 그는, 주인공의 사고와 행위를 서술하되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다. 역경 속에서 문명을 건설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 하는 야무진 주인공은 지나치게 근대적이어서 스스로 피곤할 뿐만 아니라, 남이 보기에도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거리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삽입했다기 보다는 21세기의 독자인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별다른 논평 없는 담담한 서술을 통해 스페란자의 문명화 과정을 펼칠 뿐인데, 독자가 교훈적인 감흥을 느끼기 보다는 '저런 쓸데없는 짓을!'하는 생각을 스스로 먼저 하기 때문이다.3)

문명이란 개인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사회적 인간을 위한 것이다. 우선 야생의 섬에서 처음 보는 동식물, 처음 겪는 생활양식에 이름을 붙이고, 이들이 이루는 기호체계를 새로운 문화적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지만, 총독, 주교, 화폐, 휴가 등의 개념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근대화된 스페란자라는 언표적 세계의 균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들 개념이 섬에 혼자 있다는 간편한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이어서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마땅히 타자로 삼을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스페란자 자체를 대상화하기에는 개인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동굴에서의 숭고한 체험으로 느끼게 된다.

이 무렵, 정체된 로빈슨의 삶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로빈슨이 본의 아니게 목숨을 구해 준 원주민 방드르디이다. 로빈슨은 마음 놓고 타자화할 대상을 만나 내심 반가워하며 내키는 대로 그를 부린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스페란자에 생긴 균열을 본격화시킬 무기로 온통 무장한 인물이다. 그의 강력한 무기는 웃음이다. 웃음 앞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엄숙함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고달픔도 무장해제 돼버린다. 웃는 얼굴을 대할 때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 그려진 중세 수도원이 감추고자 했던 비밀이 웃음에 관한 문헌임을 떠올려 보자. 호르헤 수도사가 민중의 웃음을 두려워했듯, 로빈슨도 처음에는 웃음에 대한 두려움을 꾸지람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계와 강압은 웃음에 굴복하고야 만다. 방드르디의 장난기와 호기심에 동굴이 폭파된다는 것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스페란자의 동굴이 물리적으로 무너져 내려 로빈슨이 개척한 문명이 파괴된 것이 하나이고, 로빈슨의 근대적 사고체계도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 다른 하나이다. 마침내 그도 방드르디와 함께 사고하고 유희하게 된다. 더 이상 방드르디는 계몽의 대상이 아니며, 스페란자도 개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근대가 가져온 주객의 이분법을 포기하는 것과 함께 로빈슨의 인식체계도 회복되었다. 인식주체가 내면의 지각형식에 따라 세계를 구성하는 구도를 함께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스페란자에는 서구문명의 기표들을 적용할 대상도 없고, 그 기호들을 공유할 타인도 없다. 그럼에도 로빈슨은 서구의 근대적 생활양식을 고집했으므로 그의 기호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4) 반면 로빈슨이 스페란자를 객체화하지 않고 함께 유희하는 상대로 인식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인위적으로 무엇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드르디 이전의 스페란자에서 물시계가 멈추면 둘 뿐인 주민들이 휴가를 얻는 것은 로빈슨이 구축해 둔 문명이 잠시 백지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주인과 노예의 위계가 사라지고 시간을 계량하여 생활 할 의무도, 노동의 의무도 면제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구화된 스페란자의 질서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 위한 잠시의 휴식에 불과하다. 로빈슨을 정점으로 하는 스페란자의 질서는 휴가 기간에도 잠재되어 있다. 반면 방드르디 이후의 스페란자에서 로빈슨과 방드르디가 서로를 흉내내는 놀이는 다시금 주인과 노예의 위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놀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방드르디 이전에는 스페란자 섬에서는 기존의 서구문화가 재현되고 있을 뿐 창조적인 가치가 생겨나지 않았다. 로빈슨은 방드르디에게 별 의미도 없는 노동을 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노동의 무목적성이 강조될 수록 그 노동은 지루하거나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스페란자는 '노예'의 윤리가 지배하는 섬이었다.5) 그러나 방드르디 이후에 두 주민의 행위에는 그들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담겨졌고, 그들의 의지가 관철되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조금의 이윤도 남지 않아도, 어떤 목적의 수단도 아니면서 방드르디는 목숨까지 걸어가며 앙두아르와의 게임을 벌인다.

'주인'의 윤리가 통용되는 새로운 섬에서 그들의 놀이는 기꺼이 반복되었다.6) 두 주민은 서로 상대방이 되어보며 앙금을 해소한다. 그들의 놀이가 반복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들의 놀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매번 각각 새로운 놀이가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까지도 긍정한다. 웃음과 함께 등장한 '주인'의 윤리는 졸렬한 위계로 질서를 강요하던 시절도 그렇게 포용한다.

로빈슨이 청교도적 선악 개념을 잉여생산물과 진창으로 환유하여 갖고 있다면, 방드르디는 선악을 넘어선 세계를 살고 있다. 생물에 대한 연민에 있어서도 로빈슨은 물론이고, 지금의 우리와도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는 함께 즐겁게 놀던 기억과는 별개로 동물의 죽음에 대해 연민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에게 생물학적 죽음이란 심판이나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문턱 중 한 가지일 뿐이며, 생물들은 죽어서도 계속 그와 함께 한다. 그래서 앙두아르는 연과 악기가 되어 그의 친구가 되었다.

맺음말: 20세기에 읽는 로빈슨 크루소

'방드르디'는 20세기의 관점에서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이다. 사건의 형식만 닮았을 뿐, 투르니에의 소설은 디포의 그것과 전혀 다른 사상과 목적으로 씌여졌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스페란자는 근대 문명을 반성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실험실이다. 그 실험의 전말이 맨 얼굴로 세상에 나왔다면 팍팍한 논문의 형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풍요로운 문학의 옷을 입고 등장한 '방드르디'는 훨씬 더 구체적이면서도 우아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자신을 내보였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4년 3월 24일에 처음 써서 6월 22일에 마무리

주---------------

1) 칸트는 인식에 있어서 감성과 오성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며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칸트는 인식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시공간 개념과 선험적인 범주에서 찾았다. 반면 후기구조주의 사조에 의하면 그 인식의 선험적 구조는 언어에 관련된다. 푸코의 에피스테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가 이에 해당한다. 칸트는 인식틀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한 반면,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식틀은 주관적인 것이다. 기호체계를 공유할 타인이 사라지면 인식체계에 혼란이 온다는 것은 후자의 이론에 부합하는 관점이다.

2) 베버는 자본주의를 주도해 나가는 계층이 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트임을 주목했다. 겉으로 보기에 자본주의의 탐욕과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조금 모인 재산을 향유하지 않고 재투자해야 하는 금욕적 윤리관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3) 어쩌면 이것도 투르니에가 의도하고 일부러 담담하게 쓴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텍스트도 독자가 바뀌면 해석이 바뀌기 마련이다. 보르헤스는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에서 원작과 완벽하게 같은 텍스트를 재탕한 작가를 독특한 해석을 붙여 칭송하는 너스레를 떤다.

4) 로빈슨의 기호체계가 위협받는다는 것은 그의 인식틀이 위협받는 것을 의미한다. 주1 참조.

5) 니체는 ‘노예’와 ‘주인’이라는 말을 독특한 의미로 사용한다. 노예의 도덕은 천박하고, 남에게 가치에 대한 정의를 의존하거나 무의미 속에 삶을 방치하는 도덕으로 평화, 순종, 자비를 강조한다. 반면 주인의 도덕은 삶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가치를 세워 나가는 사람들의 도덕으로, 파괴와 재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힘을 옹호할 것을 강조한다. 주인의 도덕을 체화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초인이다. 한편, 일상적인 맥락과 달리 현실의 지배자를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예가 주인을 지배하는 사회가 있을 수 있는데, 니체는 그것을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사회로 보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소설에서 로빈슨은 니체의 비판의 대상이 된 기독교와 근대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인물이며, 방드르디는 그에 대비되어 주인의 도덕을 체화한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6) 놀이의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관계된다. 초인에게 영원회귀는 무의미한 물리적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악이라도 다시 듣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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