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도구를 가진 가상현실

엄밀한 의미에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짓기란 곤란한 일이다. 다만 이런 저런 공존하거나 계층적으로 겹쳐 있는 세계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물리적 관점에서)자연의 세계, 현대 도시 일상의 세계, 바둑의 세계, 고등학생들의 세계, 국제 정세 등, 관점에 따라 제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으며 이 세계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공존한다.

많은 경우 이 세계들은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내부의 변화는 일정한 외연을 가진다. 날씨는 매일 변하지만, 몇 가지 패턴의 불규칙적인 반복이고, 바둑은 매 경기가 다르지만, 어떤 경기도 바둑의 규칙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세계는 내부에서 세계 자체가 달라지는 변화를 겪으며 재귀적으로 그 복잡성을 증가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류의 기술문명이다. 흔히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키게 된 계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침팬지나 곰과 같이 초보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단지 그것만이 문명 발달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이들 동물들이나 석기시대 수준의 문명을 갖고 있는 원시 부족들은 전래되는 도구의 단순한 소비자로 그치고 있기 때문에 문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가 스스로 복잡해져갈 수 있는가의 여부는 도구를 만드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도구를 만드는 도구는 스스로를 향상시킬 수 있다. 이 메타도구를 통해 더 복잡하고 추상화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나오고, 이 생산물들로 인해 세계가 변화한다. 대장간을 만들 수 있는 세계는 외부의 도움 없이 자동차공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다른 예로 소프트웨어의 세계는 가장 기본적인 어셈블러(혹은 튜링 머신)만 주어지면 일구어질 수 있다. 어셈블리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C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고, 이것으로 또 다른 고급 언어 컴파일러를 작성하는 식으로, 현재 이루어진 모든 소프트웨어 기술을 구현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향상된 도구가 나올 수록 세계를 규정하는 규칙이 달라지고, 인간이 지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끝은 열려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바둑의 세계와 같이 도구를 만드는 도구를 가질 수 없는 세계이다. 가상현실 내부의 객체들은 외부의 도구를 통해서 생산되고, 그 객체들이 자신을 만들었던 것과 같은 도구를 만들 수는 없다. 만들더라도 현재의 도구가 사물들을 조합하는 방식을 더 추상화하여 향상시킬 수가 없다. 이런 것이 가능해지는 세계는 가상현실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가 될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놀이와 예술이 그 안에 한계지워지지 않은 채로 창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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