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는 그러고 보니 게임을 별로 하지 않았다. 게임이란 표현분야가 가진 잠재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확신을 굳혀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잠재력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이는 작품은 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로 적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해 해 본 게임 중 해볼만한 것 위주로 간단하게나마 소묘해 본다.
Civilization 3: Play The World
모든 실시간 전략은 듄2에서 시작해서 스타크래프트를 경유하여 뻗어나가고, 턴제 전략은 삼국지에서 시작해서 삼국지에서 끝난다. 문명은 분명히 종자부터 다른 게임이다. 장르는 전략으로 구분되지만, 이것과 닮은 전략 게임을 보지 못했다. 삼국지 류의 고에이 게임과는 턴제 전략이라는 점 빼고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처음 문명을 접하고 느낀 당혹감도 삼국지와 비슷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빚을 지고 있었다. 도시 건설, 도시 안에서의 생산관계, 문화력과 생산력 증대, 외교 위주의 전략, 자동화된 일꾼, 다양한 승리조건 등 새로운 개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게임에서 사용되는 실세계의 용어들이 실세계의 용법과 은유적인 수준의 연관성만을 갖는 반면(스타크래프트의 데드락은 실제 데드락과 약간 비슷해 보일 뿐이다.) 문명에서 도시의 시설이 늘어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인구가 밀집되고, 2차 3차산업 종사자가 나타나는 등의 구조는 실세계의 그것과 그럭저럭 유사해 보인다. '그럭저럭'유사해 보이는 수준이 찬사를 받을만한 이유는 모방의 대상이 유구한 역사의 인류문명 전체라는 대담한 시도에 있다. 물적 생산관계, 도시의 발달, 외교, 전쟁, 기술 등이 인류 전체의 역사와 발맞추어 꾸며져 있어서 모방으로서의 게임으로도 괜찮을 뿐더러, 그것이 게임 안의 질서로서도 꽤 조화롭게 되어 창조된 세계에서의 놀이로도 재미가 있으니, 안팎으로 훌륭한 게임이다.
게임이 3탄에 이르고, 여러 개의 확장팩을 출시하는 정도에 이르면 지루해 질만도 하련만, 문명은 아직 갈 길이 훨씬 많은 게임이다. 이것은 '문명'이라는 대담한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한 시드 마이어에게 내려진 축복이자 업보이다.
Rise of Nations
퓨전이란 이런 것이다. 문명과 에이지오브엠파이어를 누가 이렇게 훌륭하게 혼합할 생각을 해낸단 말인가!
Grand Theft Auto:Vice City
창조자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감상자는 그 세계 안에서 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게임이라면, 외부의 질서를 차용하고 그에 의한 사건들이 곧 작품이 되는 것이 영화를 비롯한 전통장르이다. 매트릭스가 영화의 형식으로 표현되면서 끊임없이 게임을 지향한다면, 어드벤처는 게임의 형식으로 표현되면서 끊임없이 영화를 지향한다. 그 중에 GTA는 게임과 영화의 줄다리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작품으로 보인다. 서사 구조가 이미지와 합쳐질 때 갖는 힘을 그대로 게임의 장점으로 살리면서, 게이머에게 새로운 세계의 역학을 제시하는 역할도 충실하다. 알 수 없는 버텍스 트랜스포머 버그로 그리 오래 진행하지 못했다.
Need for Speed: Underground
Unreal Tournament 2003
'게임=기록=경쟁'이라는 고정관념에 가장 부합하는 장르가 스포츠와 FPS이다. 형이상학적 질서의 단순명쾌함에 힘입어 이미지에 쉽게 초점이 맞춰지는 특징도 이들의 몫이다. NFS:Underground는 비사실적 렌더링 컨셉으로 현란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미덕이다. 자동차 경주 게임의 사실성과 오락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보여주는 운전감도 평가할만 하다. UT2003도 역시 말도 안 되는 비현실감이 시원시원하게 쏘고 맞는 재미를 쏠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