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김현 - 감독을 꿈꾸는 영원한 가위손

김현이 1991년 <베를린 리포트> 후반작업으로 파리에 갔을 때, 한 프랑스 평론가가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는 왜 편집인이 김현밖에 없냐?”

김현을 말하는 건 새삼스럽다. 배창호, 곽지균, 박철수, 정지영, 박광수, 장선우, 강우석을 거쳐 최근의 이창동까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주목할 만한 감독들은 모두 김현과 작업했다. 예외가 있다면, 친형제처럼 아끼는 박순덕 기사와 편집을 해온 임권택 감독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종상 등 그가 받은 각종 영화제 편집상이 15개이고, 어떤 해에는 영화진흥공사가 추천한 좋은 영화 12편 가운데 11편이 ‘편집 김현’이라는 크레딧을 달고 있었다. 전문편집인 1세대임과 동시에 아직도 정상을 지키고 있는 한국 영화편집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김현과 영화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김현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남에게 말하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에는 필시 그만큼 기구한 사연이 따를 터. 한 사람의 55년 삶과 꿈을 통째로 장악해온 이런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몸서리쳐지는 가난, 중학교 중퇴의 학력, 허드렛일과 노숙과 허기를 그는 영화에 대한 사랑 하나로 버텼다. 날씬한 몸매와 완벽한 자태를 과시하기만 할 뿐 그의 삶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영화가 그 순정에 답해온 건 아주 조금씩 긴 세월을 통해서였다. 과묵한 그가 말문을 열었다.

글 임범 isman@hani.co.kr·사진 이혜정·편집 권은주

#1. (문무왕 해저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시골 마을의 밤. 동해 먼 바다에서 고래가 자맥질을 한다.)

7살 꼬마 현기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좇아 담장 높은 집으로 달려갔다. 과연 처음 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담에 걸어놓은 하얀 천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영화! 현기는 반해버렸다. 가난에 찌든 지루한 현실 속에서 이야기, 그것도 진짜 사람들이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펼치는 그 이야기의 힘은 구원처럼 꼬마를 사로잡았다. 상영 중이던 영화 <두 남매>는 아쉽게도 끝날 무렵이었다. 황해가 잡혀가고, 이경희는 눈물을 흘린다. 변사가 울먹인다. “오빠!”

그뒤로 영화를 튼다고 하면 십리 밖 감포까지도 쫓아갔다. 백사장에 쳐놓은 스크린이 바닷바람에 휘날릴 때, 꼬마의 마음도 휘날렸다. 뉴스, 문화영화에 이어 영화가 끝나면 새벽 1∼2시. 밤바람에 요동치는 소나무 밭이 무서워, 여름이면 백사장에서 그냥 잤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걸 사랑이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현기는 학교 들어가서 공부를 잘했다. 줄곧 1등하다가 5학년을 건너뛰고 6학년으로 월반했다. 그림도 잘 그려서 사생대회 나가면 큰 상을 받았다. 6학년 때 학교 운동장 한켠에서 친구들한테 “난 영화감독이 될 거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스스로 생각했던 공식적인 희망은 화가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가서 만지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다.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너무 가난해서 계속 다니기가 힘들었다. 중퇴한 뒤에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할 수 있을까 암중모색해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19살 때 공장에 들어갔다. 지금의 한국비료로, 당시에 竊봉?지었다가 나중에 삼백사건에 휘말렸던 그 공장이었다. 월급 타면 모았다가 한두달에 한번씩은 꼭 부산에 가서 영화를 봤다.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현실은 더욱더 영화와 멀어져갔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더 절실해졌다. 영화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영화에 대한 책 한줄 읽은 것 없이 결심을 했다. 공장 집어치우고 달랑 차비만 갖고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때가 20살이었다. 어머니가 서울로 찾으러 올까봐 이름을 ‘김현기’에서 ‘김현’으로 줄였다. “난 영화를 만들 거야.”


#2. 새벽의 남산야외음악당.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기상나팔처럼 들려온다.
음악당 무대 한구석에서 신문지 덮고 자던 김현은 부스스 몸을 떨며 일어났다. 자기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남산에서 내려와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시장골목에서 상인들이 나무를 때다가 불씨가 남은 드럼통을 찾았다. 그 옆에 누워 못다 한 잠을 청한다.

60년대 후반, 그때만 해도 시장이 많았다. 닥치는 대로 시장 바닥에서 리어카 끌고, 아무 데서나 자고, 하루에 한끼 먹으면 다행이었다. 끼니 해결이 안 돼 며칠씩 굶게 될 때면, 저녁 무렵에 무교동에 나갔다. 식당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주면,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밥을 준다. 식당엔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 밖에서 비오는 날이면 빗물에 밥말았다손 치고 먹던 그 밥이 이후에도 김현의 기억 속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으로 남았다. 그 무렵, 첫 주간지인 <주간한국>이 나왔다. 그걸 팔러 명동으로, 시청 앞으로 나다녔다.

서울 온 뒤 맞은 첫 추석 때 집에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화신백화점에서 옷을 한벌 샀다. 그걸 보물단지처럼 의자 뒤에 걸어놓고 무교동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와보니 옆에서 구두 닦던, 서울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친구가 그 옷을 들고 사라졌다. 집에 못 간 채, 시장도 무교동 식당도 다 문을 닫고 혼자 남아 버텼던 그해 추석은 죽도록 서러웠다. 시청 앞에서 <주간한국>을, 지나가던 검은색 큰 승용차 안의 손님에게 팔았다. 잡지를 건네줬더니 돈을 안 주고 냅다 중앙청쪽으로 달려 가버렸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모두 그를 속이고 달아났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영화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김현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수시로 피를 팔았다. 그 돈으로 극장에 갔다. 명절 무렵이면 암표상들로부터 표 사달라는 부탁과 함께 돈을 받고는, 표를 사서 그냥 극장에 들어갔다. 마침 아메리칸 뉴 시네마 바람이 불던 그때, 주옥같은 영화들이 쏟아졌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워터프론트> <젊은이의 양지>…. 아침에 극장에 들어가 밤늦게 나왔다. 배가 고파 몽롱해진 상태에서도 보고, 보고, 또 봤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에게 영화는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실무까지 모든 걸 가르쳐줬다. 그에게 “내 인생의 스승은 좋은 영화”였다.

#3. 최인현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오복문> 촬영현장. 당시엔 허허벌판이던 지금 강남 봉원사 부근

김현은 얼굴에 니스칠을 한 뒤 수염을 붙이고 포졸 옷을 입었다. 옆에서 엑스트라를 지휘하는 스탭이 앙상하게 마른 그를 보고 말했다. “너 고함 제대로 지르겠냐?” 다른 엑스트라들과 함께, 김현은 보란 듯이 “와!” 외치며 달려갔다. 고함은 질렀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쉬는 시간에, 감히 엑스트라 주제에 최인현 감독에게 말했다. “빨리 찍죠. 배가 너무 고파서.” 김현은 그때 여섯편가량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옷이 시원치 않아서 만날 사극, 포졸 역할만 했다. 거기서 영화를 어떻게 찍는지 곁눈질 할 수는 있었지만, 영화에 다가설 연줄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 와서 거지처럼 살던 2년 동안, 그에겐 유혹도 있었다. 시장에서 마약이 돌아다녔고, 남대문에 유곽도 있었다. 그가 돈 한푼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여자뿐이 아니었다. 술, 담배 모두 20대 중반까지 모르고 살았다. 오로지 영화, 스크린에 투사된 빛과 그림자와 조합에 불과한 그 허구가 김현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에게 영화는 꿈이자, 스승이자, 유혹에서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하루하루의 노역 속에 몸과 마음이 시들고 있었다.

서울역 주변에 상인들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았다. 김현은 막 지갑을 가로채려는 소매치기를 보고 말렸다. 곧이어 패거리들에게 서부역 뒤 화물차 주차장으로 끌려갔다. 실컷 두들겨맞고 트럭 화물칸에 쓰러져 실신했다. 깨어보니 트럭이 출발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몸은 피투성이이고, 장마철에 장화 신고 계속 짐을 부린 탓에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뛰어내렸다. 한강에 떨어졌지만 한강대교 중간 섬 가까이였다. 헤엄쳐서 나온 김현은 젖은 옷 군데군데 핏자국을 남긴 그대로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왜 서울에 왔던가. 영화 하자는 것 아니었나.”

“그땐 꼭 죽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싫은 거 있잖아요. 한창 꿈과 이성을 다듬어가야 할 20대 초반에 인성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거죠.” 고생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금언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웃으며 말하지만, 김현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영화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돈을 모을 다른 일을 생각했겠죠. 이런 삶, 무모하지 않아요? 그럴 가치가 있었던 걸까요?”

#4. 용산 오리온전자 옆 신필림 사무실 입구. 영화의상을 담당하는 할머니가 밖에 나와 있다.

김현은 무작정 신필림을 찾아갔다. 사무실 입구에 서 있던 할머니가 어디로 가라고 했다. 가봤더니 소도구 만드는 곳이었다. 활이나 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는 만들라고 했다. 신상옥 감독의 <대폭군> <다정불심> 같은 사극을 찍을 때였다. 몇달 동안 일했는데, 돈줄 생각도 안 하고 달라는 말도 못하고, 수시로 밥 굶고, 생활은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연출을 꿈꾸었던 김현은 불만이 쌓여갔다. 안양촬영소에서 <내시>를 찍을 때, 조감독이었던 이장호와 크게 싸웠다. “왜 소도구를 준비 안 했냐”는 질책이 기폭제가 돼 김현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말을 거의 안 하고 지내던 그가 “왜 내가 그걸 준비해야 하냐”며 맞받아쳤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 웅성댔다. “어, 쟤가 말도 하네.” 추석 때 이장호 조감독이 김현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 김현은 처음으로 남에게 자기의 사연과 연출을 하고 싶은 꿈을 털어놓았다. 69년 1월1일, 김현은 신필림 편집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순정에, 영화가 처음 반응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제 진짜 영화를 만드는구나.”

당시 한국영화는 신필림이 반, 나머지 회사들이 반을 만들어 영화판을 신필림과 충무로로 나눠 불렀다. 신필림은 직원이 500∼600명, 1년 제작편수가 30여편에 이르렀다. 편집실엔 오성환 기사와 여자 둘, 할리우드에서 가져온 무비올라 편집기 4대가 있었다. 김현은 러시필름을 붙이고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편집실이라는 데가 누가 뭘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었고, 그는 혼자서 엔지난 필름으로 나름대로 편집해보며 스스로 익혀가야 했다.

신상옥 감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몰라서인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이장호 조감독이 신 감독의 입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통금이 있던 그때, 신 감독은 야간통행 허가증이 부여된 차를 몰고 다녔다. 신필림 편집실을 안양촬영소 안으로 옮긴 뒤, 김현은 그 안에서 살았다. 24시간 대기조였다. 편집실 구석에 웅크려 자고 있던 어느 날 신 감독이 나타났다. “현아, 예고편 만들자.” 마침내 영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 신 감독의 72년작 <삼일천하 김옥균> 크레딧에 ‘편집 김현’이라는 네 글자가 박혔다.

#5. 서울 시내 호텔의 커피숍. 신상옥과 김현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
김현은 싫다고 했다. 78년, 신필림이 허가취소된 지 1년 남짓하던 때였다. 영화사 허가를 다시 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신 감독의 시도가 다 좌절되자, 신 감독은 자신이 아끼던 편집의 김현을 포함해 촬영, 조명기사를 데리고 홍콩에 가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체로 여권을 준비하던 와중에, 신 감독이 김현과 둘이 먼저 홍콩에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김현은 영어도, 중국말도 못 하는데 홍콩에 먼저 가서 뭘 할 수 있겠냐며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신 감독이 납북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전에도 신필림은 부도가 나서 1년가량 쉰 적이 있지만 신 감독의 수완으로 극복해왔다. 이제 신필림이 재기할 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김현은 실업자가 됐다. 한편으로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 해방됐다 싶기도 했다. 그는 “내 꿈은 연출”이라고 줄곧 말해왔지만, 신 감독이 “편집을 알면 연출도 잘된다, 좀더 해라”고 해서 여기까기 왔다. 실업자가 된 게 역으로 감독으로 나설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김현은 돈도 없었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에게 남아 있던 가난의 그림자가 무서웠다. 이장호 감독이 데뷔해 영화를 찍고 있었지만, 김현은 그걸 편집할 아무런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장호의 조감독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배창호 감독이 82년 <고래사냥>을 들고 왔다.

“맥주 한잔 더 할까요?” 평소와 똑같은 억양으로 묻는 그는 하나도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가까운 맥주집으로 2차를 왔지만, 80년대 이후, 그러니까 편집인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뒤부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90년대 중반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한국의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해왔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지금도 편집을 하고 있고, 몇년은 더해야 하는 처지에서 감독들 품평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중견감독들이 시들한 게 큰 문제”라면서도 “감독들한테 할말이 정말 많지만, 편집에서 은퇴할 때 할게요”라고 덧붙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못다 이룬 연출의 꿈을 되새기며 자리를 파했다.

#6. 돈암동 삼영필름 사무실. 한쪽 방에 필름 더미가 쌓여 있다.

김현은 혼자서 열심히 자르고 붙였다. <고래사냥>은 명실상부하게 자신이 책임지고 편집한 첫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편집도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영화는 성공했고, 이후부터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다 맡았다. 84년 충무로에 김현 편집실을 내고, 신필림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던 박철수 감독의 <어미>를 필두로 신명나게 일하기 시작했다. 유명감독들의 작품이 몰려들었다. 86년 후반부터 동시녹음이 본격화되면서 김현의 주가는 더 뛰었다. 신필림 시절 신상옥 감독이 <대원군> 세트 촬영에서 동시녹음을 했고, 김현은 이미 그때 동시녹음 편집을 해본 상태였다.

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호헌철폐운동이 벌어질 때, 정지영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과 함께 편집기사로 유일하게 반대서명을 한 탓에 영화사에서 편집 중이던 필름을 회수해가는 일이 벌어졌다. 반년가량 놀아야 했지만, 곧 다시 일감이 밀려들었다. 장선우, 박광수, 강우석 등 데뷔감독들도 줄지어 찾아왔고, 그는 동시녹음 기자재 스탠백이 있는 영화진흥공사로, 필름 싸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90년에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5천만원가량 하는 스탠백 편집기를 그에게 사줬다. 1년에 10편 넘게 열심히 자르고 붙이고, 마시면서 과로로 쓰러져 한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7. 답십리 김훈의 집. 밤늦게 잠 못 이루고 창 밖을 내다본다. 멀리 동해바다에선 다시 고래가 자맥질을 한다.

48년생. 50대 중반을 넘긴 김현은 영화와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연출을 못해본 것이다. 직접 쓴 시나리오가 4편 있지만, 지금도 엄두를 잘 못 낸다. 실패해서 다시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꾸 따라붙는다. 30대 감독들이, 김현을 어려워해 다른 젊은 편집기사들을 찾아가면서 최근엔 일감이 1년에 4∼5편으로 줄었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귀여워>의 김수현 등 그를 찾아오는 30대 감독은 조감독 시절부터 알던 이들이다. 요즘은 40대 후반에 결혼해 낳은, 초등학생 아들과 주말에 북한산 가는 게 갈수록 즐겁다. 주말이 다가오면 설레기까지 한다. 그 즐거움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걸까. 이렇게 늙어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애써 떨치며 다시 다짐한다. “난 영화감독이 될 거다.”

김현 필모그래피
1972년 <삼일천하>
1974년 <욕망>
1975년 <아이러브 마마>
1976년 <여수 407호>
1977년 <사나이들>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4년 <고래사냥>
1985년 <어미> <고래사냥2>
1986년 <황진이> <안개기둥>
1987년 <거리의 악사> <기쁜 우리 젊은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8년 <성공시대> <사방지> <칠수와 만수> <달콤한 신부들> <개그맨>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비오는 날 수채화>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 <남부군> <마유미> <그들도 우리처럼> <꿈>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날의 초상>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서울에비타> <베를린 리포트> <천국의 계단> <경마장 가는 길>
1992년 <걸어서 하늘까지> <하얀 전쟁> <미스터 맘마> <그대안의 블루> <첫사랑> 1993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웨스턴 애비뉴> <화엄경> <그 섬에 가고 싶다> <투캅스>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두여자 이야기> <49일의 남자> <세상밖으로> <게임의 법칙> <너에게 나를 보낸다> <마누라 죽이기> <젊은 남자>
1995년 <남자는 괴로워> <금홍아 금홍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맨?> <런 어웨이>
1996년 <러브스토리> <투캅스2> <지독한 사랑> <고스트 맘마>
1997년 <초록물고기> <비트> <산부인과>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1998년 <태양은 없다>
1999년 <이재수의 난> <정> <구멍> <해피엔드> <박하사탕>
2000년 <킬리만자로> <청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무사>
2001년 <봄날은 간다> <흑수선> <오아시스>
2002년 <연애소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3년 <와일드 카드> <귀여워> <영어완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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